황우 이준범 시의 세계 / 윤종덕(한국문인협회 시인, 평론가)
이준범(李俊凡)
경남 창녕 遊漁 加項里 1922. 2.15.~2004. 1.24. 號 黃牛. 건국대학교 국문학과 한국현대시인협회 심의위원장, 한국아동문학가협회 상임이사.
新文藝同友會 부회장. 詩脈, 수필 空論同人.
한국단식보급회장.
동시집<팔려간 송아지> 소년소설집<코주부 선생님>
우화집<공작 꼬리를 빌린 여우>
편저<어린이 동물문학> <동시짓기공부><이준범아동문학 전5권>
역편<세계명시선 : 산 너머 저쪽> 한국명시선<님의 침묵>
2004년 2월 10일 디지털 창녕일보 제764호 특집
▷ 추모사1 : 백발 휘날리며 우뚝 솟은 거목이시여
인고의 나뭇가지마다 뜨거운 생명력으로 피어오르는 온유하고 아름다운 고향사랑 자태의 꽃을 봅니다. 긴 겨울동안 강렬한 불꽃을 태우다 그 많은 세월들을 뒤로하면서 이 세상을 떠난 당신은 만연의 고향사랑, 후학사랑의 미소를 머금은 채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않은 길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당신이 그 마지막 길을 지켜본 많은 군민들을 이구동성으로 창녕이 낳은 거목, 한국시단의 원로 큰 별이 떨어졌다고 애도하고 있습니다. 그 슬픈 이면에는 당신이 남기고 간 발자취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소슬한 바람결에 그윽한 향기가 물들어 가는 관목 숲을 지나 산자락에 백발을 휘날리며 우뚝 솟은 거목을 봅니다. 인생의 깊은 의미와 회의와 추억을 통한 같은 것들이 유어면 가항리 앞 낙동강 물이 되어 끝없이 흐르며 가슴 여미게 하는 주옥같은 글귀를 남기고 간 거목이시여.
꿋꿋하고 강인하면서도 부드럽고 인자하여 늘 희망과 환희로만 느껴졌던 거목이시여, 어느덧 이 세상을 떠나시니 미끄러지듯 바람보다 빠르게 바스러지는 인생의 허무를 다시금 실감나게 합니다. 먼발치에 감히 바라만 보아도 느낌에서 고향사랑, 후학사랑의 향내가 우리의 가슴을 여미게 하고, 어느 때나 신록처럼 푸르고 소탈하고 유난히 고운 성품이 어느 모로 재어보아도 모자람이 없는 당당함이 군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심취케 했습니다. 지금도 귀 기울이면 눈이 내리는 오후같이 포근하고 따스한 가슴의 무한한 인간애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욱 값진 것의 생성을 위해 고통의 불꽃을 태워 향토문학 발전과 후학들을 보석으로 만들기 위하여 거룩한 뜻을 세우신 거목이시여, 지금도 나직한 목소리로 부드러운 촉감으로 내리는 한밤의 빗소리 마냥 친근하고 따뜻한 마음이 무리 군민들의 가슴에 오랫동안 남고 그 은혜로운 빛살 때가 영영 창녕에 머물며 굽이치게 하소서.
거목이 못 다한 그 많은 일들은 거목이 남기고 간 고향사랑 후학사랑을 높이 평가하면서 애도하는 많은 분들의 몫이 될 것입니다. 거목이 남기신 가슴 저미는 시, 글귀들은 영원히 잊지 않고 우리 군민들과 함께 기억할 것입니다. 이젠 거목을 영원히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비통하고 가슴이 아픕니다. 고 황우 이준범 옹님, 거목의 값진 인생 우리에게 영원히 가슴에 남아 있을 것으로 확신하면서 편히 잠드시길 군민들과 함께 진심으로 애도합니다. <편집사람들과 조기환>
▷ 추모사2 : 모두 주고 가신 선생님
오호 통재여! 황우선생님. 세월의 무상을 인생의 덧없음 감누를 금치 못합니다. 한없이 주고 싶었던 선생님의 뜻! 모두를 다 주고 가시는 그 높은 심정을 어이 말씀 올리오리까?
낙동강 푸른 물결은 끝없이 흘러가건만 선생님이 모습은 어디로 홀로 떠나가십니까? 한없이 걸어오신 머나먼 길을 돌이켜보면서 검정 두루막에 빛 바랜 검은 운동화로 높은 뜻 길이셔 걸어오신 창녕 땅 고향 길… 주막집 아낙네들의 웃음소리에 덩실덩실 춤을 추며 한없이 주고 싶은 그 인정을 그 어찌 남겨두고 가신단 말입니까? 민족의 설움 속에 배달겨레의 눈물 속에 농부들의 아버지로서 그 할아버지로 얼마나 가슴 아픈 세월 참아오셨습니까?
선생님의 그 모습 웃음 속에 백발을 휘날리며 성스러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초라한 골목마다 웃음 주고 정주고 지내던 그 수많은 날들이 그리워서 어찌 눈감으셨습니까? 막걸리 한 잔에 소주 한잔 그렇게 즐거운 나날 사모님 모시고 종종 걸음으로 고향 땅 가항동산을 그토록 바라볼 여념도 이제는 영영 사라지고 만답니까? 화왕산 마루에 낙동강 벌판에 향기 높은 꽃을 피워 영원한 보금자리를 낙락장송 푸른 절개 고이고이 지니시고 흐르는 세월 막을 길 없으니 우리 모두 눈물 속에 보내드리옵니다.
다 주고 모두 주고 정주고 가시는 선생님…창녕문화원, 창녕군민 다함께 선생님이 극락길 높이 받들어 영원무궁토록 비나이다. 두고 가시는 가족과 친지들의 앞날에 서광을 기리옵고 그토록 염원하시는 문화창달의 높은 뜻 길이길이 받들어 가슴 깊이 새기며 다짐하면서 선생님의 영전에서 고하오니 편안히 고이고이 영면하소서 2004년 1월 27일 창녕문화원 임원 일동 삼가 재배.
▷ 행장 : 창녕이 낳은 거목, 한국 시단의 원로시인 황우 이준범 옹이 84세로 지난 1월 24일 세상을 떠나 27일 가족장으로 통일추모공원에 안치했다. 애향시인 이준범 옹은 유어면 가항리 출신으로써 자신의 첫 시집인 “황우”의 발간과 함께 우리나라 시단에 데뷔했다. 국제펜클럽 한국본부회원, 한국현대시인협회 중앙위원, 한국아동문학가협회 부회장, 동아출판사, 금성출판사 편집국장으로 역임한 바 있다. 특히, 고향사랑이 남달라 어려운 문학길에 몸담은 후배들을 격려하고 향토문학 창달을 염원하는 일념으로 96년 1천만원, 97년 1천만원, 창녕문화원에 3천만원을 추가 출연하시어 가시는 그 날까지 고향 후학사랑에 몸바쳐 왔다는 평가다. 황우 이준범 옹은 시인 특유의 깊은 애향심을 불태우는 고향사랑의 실천자이다. 향인들에게 향토애를 고취하기 위하여 지난 95년 고향인 유어면 가항리 동구로 자비로 자작시 수향덤묵을 새긴 애향시비를 건립한 바 있으며, 1999년 10월에 군민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작품으로는 “황우” “탱자나무꽃” “주춧돌”“노루아지”“잡초 속의 해인사”“이준범 아동문학”“수양대군과 한명회” 외에 논문으로는 “시에 있어서 상상력”을 비롯한 50여 권의 저서가 있으며, 현재까지 발표된 시는 1천 여편에 이른다고 한다. 특히 고향사랑과 후학을 위해 마지막 남은 유품인 책들과 고서적을 고향 땅에 기증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서고를 마련하지 못해 창녕문학인들은 안타까워하고 있다는 것. 본관이 인천인 한국시단의 원로시인 이준범 옹의 취미는 서예감상, 기호품은 수석, 그리고 부인 김을순 여사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
▷ 추모시/ 화왕상에서 북한산까지 - 고 황우 이준범 선생의 영전에 바쳐
요 며칠 정월 칼바람이 불었습니다.
선생께서 우리를 버리고
이 땅의 모든 생명들마저 버리고 가시려고
쟁쟁쟁 칼바람이 불었습니다.
화왕산에서 북한산에 당도하기까지
선생께서는 이 땅에
맑은 詩 구절로 굵은 강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낙동강보다 더 힘찬
강 하나를 만들어 두셨습니다.
우리가
그 강물에 배를 띄울까 합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 내리면 눈을 맞으며
우리는 강줄기를 따라 배를 저어갈까 합니다.
오늘은 선생의 가슴만큼이나 따뜻한
동녘 해가 떠올랐습니다.
선생께서 늘상 보듬고 계셨던 고향산천에는
저 따뜻한 햇살을 받아
머지않아 화왕산 진달래가 꽃불을 피울 것입니다.
살아생전 선생의 자태만큼이나 곱디고운
진달래가 일제히 꽃등을 달아 올릴 것입니다.
선생께서 뿌려놓으신 거름 덕분에
고향 들판마다 기름진 곡식들이
수북수북 영글어 갈 준비를 합니다.
이제 이 칼바람이 그치고 나면
살아생전 고향산천에 지천으로 피어날 것입니다.
고향 창녕 땅 후학들이 감읍합니다.
▷ 2003년 11월 5일 디지털 창녕일보 제761호 만옥정
어느 老詩人의 고향사랑/ 이철환 창녕향교 장의/ 창녕문화원 이사
한 더위가 절정에 달해 있는 지난 7월말 서울에 계시는 창녕출신 老시인 한 분이 조용히 그의 고향인 창녕을 다녀갔다. 올해 83세의 노구의 몸으로 어쩌면 마지막 걸음이 될지도 모르는 고향 창녕을 다녀간 것은 자신의 제자이자 처조카인 道谷 金兌庭씨가 대학강단생활을 마치고 귀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환영하기 위해서였으며 한편으로는 그가 고향을 위해서 일생동안 마무리짓기 위해서였다. 그의 고향 사람들은 남달라서 그가 젊었던 시절인 사십여 년 전부터 창녕도서관이며 모교인 유어초등학교에 수천 권의 책들을 기증해왔으며 불우한 학생들에게 개인적으로 장학금을 지급한 일도 부지기수이다.
그는 일제 암흑기가 한창 진행중인 1922년 2월 15일 그의 고향인 유어면 가항리 덤목부락에서 태어나 당시의 식민치하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농촌에서 뛰쳐나와 홀홀단신으로 서울로 올라가서 각고의 노력 끝에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교편생활을 하셨다. 해방을 전후하여 동아출판사로 옮기시어 편집국장을 역임하면서 동아출판사를 국내 제일의 출판사로 키우는데 공헌하신 후, 평소에 그가 늘 마음속으로 열망해왔던 시인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 만학으로 건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신 후 줄곧 작품활동을 해오셨다.
그가 출간한 저서로는 시집 “황우‘ ’탱자나무꽃” “주춧돌”“노루아지”를 비롯하여 번역서로는 “비원”“아끼이유끼”, 소설로는 “수양대군과 한명회” 등이 있다. 그는 천성이 약한 자를 도와주고 베풀기를 좋아하여서 그가 살고 있는 서울 신림동의 노점상들은 그가 나타나면 구세주를 만난 듯이 그를 반기고 그들과 격의 없는 친구가 되어 주었고 그가 고향마을에 와서 머무를 때면 빠뜨리지 않고 꼭 찾아다니는 집들이 있는데 마을에서 불우한 집들과 어린 학생이 있는 집이다. 그는 항상 준비해온 용돈을 그들에게 전해주면서 불우한 자들에게는 위로를 하고 어린 학생들에게는 격려하기를 빠뜨리는 법이 없었다.
1976년 10월 24일자 한국일보가 그의 선행을 보도함으로써 장안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는데 그 사연을 간략히 소개하면 ‘보리밭’ ‘광복절 노래’ 등 지금도 널리 불리어지고 있는 노래를 작곡한 작곡가 尹龍河씨가 가정형편이 어렵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의 딸의 학자금을 선뜻 보태주었는데 윤용하씨가 임종하기 얼마 전 그를 찾아와 술좌석을 같이 한 후 일어나면서 단 한마디 “이거 가지고 있게나”하고 악보를 던지고는 사라져 버렸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가 별세했다는 부음을 듣게 되었고, 그가 전해준 악보를 찾지 못한 채 지내다가 11년이나 지난 1976년에사 그의 서재를 대청소하던 중 윤용하씨의 악보를 찾게 되었는데 그 악보가 윤용하씨의 마지막 유작임이 밝혀지면서 신문사에서 특집보도를 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의 선행도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번에 창녕에 내려오시게 된 것도 그가 오래 전부터 고향 땅 창녕에 문화사업과 문학활동이 부진한 이유가 재정적 빈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판단하시고 이를 안타깝게 여기시던 중 당시에 창녕지역 문인협회나 문화원에 관여하시는 분들의 절실한 요망에 따라서 먼저 창녕문인협회에 2천만원을 출연하시어 황우문학상을 제정하시고 이어서 창녕문화원에 3천만원을 출연하시어 황우문화상을 제정하시어 해마다 시상식과 함께 격려금을 전달해 오고 있으나 그동안 물가도 인상되고 금리도 낮아져 운영에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생각하시어 문화원에 문화상 기금 2천만원과 문인협회 문학상 기금 1천만원을 추가 출연키 위해 가지고 내려오신 것이다. 그분이 이처럼 고향에 헌신하시는 것은 특별히 모아놓은 재산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분에게도 자녀와 손자들이며 개인적인 생활의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고향을 사랑하는 지고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외에도 그의 모교인 유어초등학교에도 장학기금을 출연하여 해마다 졸업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고향인 덤목부락에는 자비를 들여 애향시비를 건립하였는데 전국문학지도(교학사 발행)에 게재되어 소개되고 있다.
그가 문단에 등단한 후 특히 시인으로서의 삶도 성공적이었다. 그가 첫 시집 ‘황우’를 출간하고 등단 기념식을 서울 소공동 동명빌딩 8층에서 가졌을 때 당시 최고 시인이라 할 수 있는 趙炳華씨가 사회를 보고, 청마 柳致環씨가 그의 곁에 앉고, 소설가 박범신, 시인 박목월, 김용호, 한하운 씨등 이름만 들어도 짐작이 가는 저명한 문인들이 배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려졌으며, 그는 일생동안 국내 최고 문사들과 교유하고 格을 함께 해온 분이시다. 그는 현대문학뿐만 아니라 한문과 고전에도 조예가 깊으시어 고전문헌에 관한 글들을 많이 투고해 오셨다.
黃牛 李俊凡 선생은 개인적인 업적이나 인품이나 사회적 명성이나 특히 고향에 대한 남다른 사랑은 우리로부터 충분히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그는 마지막 남은 재산인 그가 소장하고 있는 책들과 고서적을 고향 땅에 기증하고 싶어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서고를 마련하지 못하여 아직 그분의 작은 소망을 들어주지 못하고 있다.
▷ 2005년 11월 28일(월) 중앙일보 사람사람
- 아버지의 마지막 선물, 40년 만에 받았어요.(이대여, 김정일, 윤은희)
가곡 ‘보리밭’의 작곡자 윤용하(1922~65)의 딸 은희(55)씨는 25일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부친이 타계하기 넉 달 전 작곡한 유작의 악보였다.
시인 이준범(1922~2004)씨의 시집 “황우”(1961)에 실린 ‘가는 길이 바로 가는 길이어서 좋다’(57년작)에 곡을 붙인 가곡이다. 부친의 유작 악보를 이준범씨의 장남 대여(53)씨에게 건네 받은 것이다. 4분의 4박자 E b장조의 36소절짜리 가곡이다.
비가 오는데/ 우비 없어 좋다/ 흠뻑 젖어 심화하는 게 좋다// 저만치 비 맞는 기로등은/ 시점을 어디다 두고/ 동공이 파문지노// 비가 자꾸 오는데/ 밤이 깊어 가는 게 좋다// 하늘도/ 고향도 없어 좋다// 옛 일이 못 잊혀 운다는 건/ 우는 게 아니라 비에 젖는 것// 가로수가 없는 포도/ 밤비에 젖어// 이웃 없이/ 그저/ 가는 길이 바로 가는 길이어서 좋다.
1965년 3월 윤용하씨는 동갑내기 술친구로 평소 알고 지내던 이준범 시인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윤씨는 풍문여고에 갓 입학한 딸 은희씨가 등록금이 없어 학교를 못 다닐 형편이라는 얘기를 술김에 한숨으로 뱉어냈다. 이에 이씨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윤씨의 손에 쥐어줬다.
두 달 후 윤씨가 술대접을 하겠다고 이씨를 찾아왔다. 술이 몇 순배 돌았을까. 윤씨는 악보를 이씨에게 건넸다. “이걸로 부채는 갚은 걸로 해주게,” 이씨는 윤씨가 타계한 뒤 그 악보 생각이 나서 온 집안을 뒤졌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11년 후인 76년 다락방을 정리하다 우연히 문제의 악보를 찾았다.
너무 기쁜 나머지 동양방송(TBC) FM의 가곡 프로그램 PD였던 김정일(60 현 TBN 한국교통방송 방송사업본부장)씨에게 악보를 넘겼다. 김씨는 최영섭의 편곡, 테너 김화용의 연주로 이 작품을 녹음해 76년 11얼 7일 오전 7시부터 30분짜리 특집 방송을 내보냈다. 다락방에서 잠자던 유작 가곡이 전파를 탄 것이다. 하지만 작곡자의 유족들은 이 작품의 존재조차 모른 채 30년을 지냈다.
올해 윤용하 추모 40주기 기념음악회에도 ‘가는 길…’은 연주되지 않았다. 40주기 기념음악회 소식을 접한 김씨가 집에 있던 테이프 더미에서 특집 방송 테이프를 발견하고 시인과 작곡자의 유족들에게 연락해 만남을 주선한 것이다.
“아버님이 유작 노랫말로 고른 시가 ‘가는 길…’ 이란 게 마치 죽음을 예견하신 것 같아요. 50주기 추모 음악회 때는 꼭 연주곡에 넣고 싶어요”(윤은희씨)
“등록금 빌려 주시고 받은 작품이니 저작권은 제게 있네요(웃음). 누구라도 이 곡을 연주하고 싶다면 기꺼이 악보를 빌려 드리겠습니다.”(이대여씨)
“40주기 되는 해에 유작을 다시 찾게 돼 기뻐요. 필요하신 분들께 실황 테이프를 나눠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김정일씨) - 이장직 음악전문 기자.
▷ 시세계 연구/ 윤종덕 정리
1.<黃牛> 1961년 1월 20일 발행/ 新興出版社.
2.<탱자나무꽃> 1963년 12월 10일 新興出版社.
3.<주춧돌> 1967년 6월 10일 新興出版社.
4.<노루아지> 1979년 11월 20일 三安出版社
5.<잡초 속의 해인사 양귀비꽃> 1882년 10월 20일 三安出版社
<黃牛>
생명이 넘치는 新羅의 소이다. 線과 質量感으로 소가 지닌 自然 그대로의 늠름한 기상을 表現하고 있다. 5,6世紀경의 신라의 古冢古墳에는 아름다운 服飾品 외에 많은 신라의 土器가 副葬되어 있었으나 그 속에서는 人像이나 동물의 토기는 거의 볼 수 없다. 이 사진에서 보는 소의 토기는 當時의 훌륭한 솜씨를 엿볼 수 있는 진귀한 것의 하나이다.<世界文化史大系에서>
차례
<제1부> 黃牛15/ 黑蛇와 波濤18
<제2부> 求乞27/ 가는 길이 바로 가는 길이어서 좋다30/ 의미33/ 다방(旅情)36/ 웨쳐보노니 1960년39/ 백정의 手腕42/ 凍死44/ 6월 街路樹에 기대서서47/ 颱風(케리)號53/ 금이 간 황우58/ 황우의 日課60/ 어둠을 밀고 가는 행진63/ 파리67/ 내가 곤란할 때 남을 도웁시다70/ 담뱃불은 혼자 타다 꺼졌읍니다73/ 소년과 한 소년76/ 지렁이79/ 장미82/ 溺死體84
<序> 9~12쪽
보리는 남의 밭 보리가 커 보이고, 자식은 제 자식이 제일 고와 보이는 것(莫知己牟之碩 莫知己子之惡)
産兒에게 : 처음으로 젖꼭지를 물리는 산모의 미소는 차라리 남의 눈이 수줍다 上氣가 짙었답니다.
날이 감에 : 산아의 骨相이 端正하질 못하고 額面이 狹小한 데다 處身마저 약삭빠르질 못한 주제를 이름하여 “黃牛”라 붙였더니 이웃은 비웃어 “不出”이라 別名하며 은근히 醜物로 놀려대는 것이었습니다. 병신 자식일수록 어미의 애를 태우는 것.
황우아 : 반역이야 어찌 어미의 소망이랴? 허나 주위의 受辱됨이 그리 심함에 너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좌충우돌하는 울분을 어민들 어찌하랴?
산모는 : 호로 분만을 못합니다. 위험합니다. 산파가 옆에서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산파의 助産이 서툴면 두 생명까지 잃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산파의 솜씨가 익숙질 못할 땐 그 산파의 心慮란 정말 산모이상. 난산이 되고 보면 더 말할 나위 없겠지요.
산파아닌 산파 : S는 하마 만삭을 넘겼던 “황우”를 두고 난산의 조산역을 맡았습니다. 처음엔 후일의 책임이 두렵다면서 딱 잘라 고개를 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불륜한 妊婦가 둘레에 조력할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오랜 진통을 겪고 있는 산모를 차마 어쩌지 못했음인지 S는 종내 두 팔을 걷고 나섰더랍니다. 그건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여성 된 생리였습니다.
땀을 : 뻘 뻘 흘리며 삼을 가르고 난 S는 산모의 귀에다 나직하나마 똑똑히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못생겼어도 사내자식입니다.”
S는 : 산실을 나서면서 휴- 숨을 돌이켰습니다. 생명만은 건졌다고.
S양 : 수고하셨습니다.
끝으로 : 선배의 편달로 “황우”는 뼈가 굵어갈 것을 自負하고, 앞으로의 행동의 준비자세를 다짐해봅니다. 1961. 1. 13 著者
<제1부>
「黃牛」황우는/ 아슬히 忘失했다/ 크낙한 울음과 함묵을 생각타가// 난맥한 혈통/ 분뇨의 시궁창/ 그렇게도 아름답던 장미꽃도// 표정도 색채도/ 저음도 없는 허허한 고요/ 광막한 들녘에서// 황우는/ 넌지시 반추하며 기동한다/ 하늘과 대지와 어둠을/ 아름히 호흡하며// 시침은 언제나 종점에서/ 출발이 마련되는 것// 황우는/ 여지로 자세한다// 길은 없어도 갈 길은 있어// 다시 여명으로 치뻗는 銳角은/(‘義로써’ 3시집에서 삭제)/ 네 발의 행동을 앞섰다.(1960.9.19)15~17쪽
「黑蛇와 波濤」파도가 치면/ 파도가 치면// 천년을 엎어놓은 바위 틈에서/ 흑사는/ 이끼낀 우수를 바다로 내어 밀었다// 바다-// 몸부림쳐도/몸부림쳐도// 무너지는 가슴을 메꿀 수 없는/ 저 호호/ 바다// 파도는/ 흑사의 가슴벽에/ 와르르 철썩 밀려왔다 밀려 갔다// 흑사는/ 달빛을 삼키고/ 별빛을 삼키고// 파도가 치지 않는 밤이면/ 차거운 피에 유폐된 자신이 咀呪스러/ 미칠 듯이 저주스러/ 전신을 부벼댔다// 바위가 으게져라/ 마구 피를 부벼댔다// 끝내 한점 체온은 일지를 않고-// 흑사는 목을 놓아 울었다/ 파도가 치면/ 파도는 흑사의 울음/ 흑사는 파도// 이글이글 끓는 피/ 불이 활활 이는 피// 그런 피 한방울만이라도 마시는 날에는/ 저 역년 非情의 파도를/ 단숨에 들이키겠단 흑사의 눈에/ 燐火가 날랐다/ 태양이 꺼진 암암 바다로/ 인화가 날랐다// 파도가 치면/ 바위가 흔들리는 불안이 싫어/ 첩첩이 밀려드는 암흑이 싫어// 흑사의 毒牙는/ 지질끈 지끈 제 꼬리를 물어뜯으며/ 파도가 쳤다/ 흑사가 까무쳤다// 까무쳤다 깨어나며/ 파도가 쳤다.(1961.1.12)18~23쪽
<제2부>
「求乞」전차 매표구에 붙어 서/ 손을 벌리는 하찮은 營爲로/ 뭇 발뿌리에 짓밟히는/ 수난의 한/ 노파// 그렇게/ 지지리도 못난 생명이기에/ 여지의 복된 생명이 오가는 겐가/ 구걸은 비루한 생활의 의욕// 이는 누구에게서 물려받은/ 모성의 인내도 아닌 것을/ 千번 蹉跌되어/ 지쳐 지쳐서라도 살아야 함은/ 지난 일사 미련도……/ 닥아오는 바래움도 아니오라// 버림받은 가난으로 끝내 말없이 구걸함은/ 인간에 있어/ 신의를 거슬리는 희생의 수욕됨이 없어라/ 계시함인가// 노파는/ 바로/ 우리 어머니!// 진종일 동정을 구걸하여/ 주는데도 선이 없구나(1959.8.20)27~29쪽
「가는 길이 바로 가는 길이어서 좋다」비가 오는데/ 우비 없어 좋다/ 흠뻑 젖어 심화하는 게 좋다// 저만치 비맞는 가로등은/ 시점을 어디다 두고/ 동공이 파문지노// 비가 자꾸 오는데/ 밤이 깊어가는 게 좋다// 하늘도/ 고향도 없어 좋다// 옛 일이 못 잊혀 운다는 건/ 우는 게 아니라 비에 젖는 것// 가로수가 없는 舖道/ 밤비에 젖어/ 이웃 없이/ 그저/ 가는 길이 바로 가는 길이어서 좋다(1959.9.9)30~32쪽
「의미」원죄의 질서이기에/ 억년 바위의 땀은 종로 시가에 번져 오고/ 부황난 호흡이 기류로 흘러// 영악한 사람들은/ 제마다 地軸을 안고/ 허욕의 부담으로 相殺하며 돌아가는데/ 아득한 시간에 戰友들은 제 이름은 불러보지 못하고/ 겨레의 이름 밑에 쓰러져 갔느니/ 북악은 남산을 돌아 서며/ 한강은 역류를 증언한다// 인간이 인간을 불신하는 距離에도/ 한결로 태양은 밝혀오며/ 지열은 원색의 꽃을 피워/ 언제나 미래를 충실케 하는 것// 종은 은은히 울어/ 그 먼 여운으로부터/ 이제 신은 가슴과 가슴에 내려와 실존케 하라// 지금 우리는/ 熊膽을 씹는 건강을 찾아/ 배 아픈 약으로 배를 다스려/ 어긋난 지층의 율법을 요리할 시간// 가로수에/ 오동나무꽃이 피는 계절이 찾아오면/ 그 땐 우리 태평로로 황우를 몰아/ 새로운 대열을/ 의미하자.(1959.10.19)33~35쪽
「다방(旅情)」부산한 여정에서 잠간 들려 쉬어 가는 곳/ 다방 <여정>의 밤은// 微靑 생리에 창백해 가고/ 여인의 나즉한 語聲에/ 샹송 음악은 추상된 부피로 壓感해 오는데// 稚氣 아직도 가시지 않은 내 人事는/ 심해 어느 진주패의 꿈길을 돌아 들어/ 철늦은 분화를 거리하고서/ 찻잔을 들어 쩝쩔한 입술을 적셔 보노니// 맞은편 구석벽에 기대 앉아서/ 검정 책표지를 만작이는 젊은 여인은/ 내 어디다 잊고 온 아쉬운 모습이런가// 가난한 생각 뒤에/ 말없이 마주볼 情話는 종내 없어/ 悔恨에 울고 난 서운한 解弛!// 다방 <여정>은/ 수다한 인생이 진종일 드나들며 쉬어가는/ 내 마음 허술한 뒤안 길에/ 조용히 자리한/ 아늑한 안방.(1959.12.10)36~38쪽
「웨쳐보노니 1960년」젊은 여인의 유혹보다도 가슴 벅찬 호흡으로/ 내 새 해를 맞는 이 아침에 웨쳐 보노니/ 1960년, 1960년!// 매무시하고 돌아서며 미소짓는 풍염한 신부의/ 그 부풀은 가슴팍 같은 그런 감격으로/ 덤썩 안아 안겨 딩글고푼/ 1960년/ 온 겨레의 희망으로 경륜될/ 새 해 새 아침/ 1960년// 슬픔도 질시도 묵은 서로의 과오도/ 이 시간에사 다 잊어/ 가족에게 이웃에게 어제의 원수에게도/ 瑞雪에 한결로 축복받은 마음으로/ 서로서로 맞도우며 충실하자// 머리 숙여 정중히 신년 交拜를/ 따스한 손을 잡아 신년 교배를// 元旦이면 嶺 위에 훌훌히 올라/ 동해 막 솟은 눈부신 아침 햇살에/ 설중 송백으로 푸르르던 줄기찬 산맥/ 그 산맥으로 소망을 뻗어보던 시절을 돌이켜/ 내 반백으로 다시금/ 새 해 새 마음으로 출발을 志向하여// 아름히 웨쳐보노니/ 1960년, 1960년!(1960.1.1)39~41쪽
「백정의 手腕」산 채 세워 놓고/ 剝製하는 執行은/ 인간에 있어 온/ 백정에 없는 律// 내려치는 鐵槌!// 하늘이 무너질/ 틈새라도 있으랴// 생명으로 생명을/ 박탈하는 벌 있다면/ 신이 알아 경륜하리니// 발랄히 칼질하는/ 순수한 삶의 의욕// 피 묻어 진실된 백정의 수완엔/ 한 뼘 여백으로도/ 흥정할 수 없는/ 斷!(1960.1.7)42~43쪽
「凍死」砲門 앞에 선 내 심장에다/ 쇠잔한 생명 포대기를/ 내 던진/ 凍死!// 구걸은/ 차라리 강도보다도 비겁한/ 어처구니 없는 인간 무능의 소위라/ 주위는 너를 버려 얼어 죽게 하였나니/ 깍두기를 박아쥔 언 밥덩이// 餓死가 가지고도 다 먹지 못하여/ 이토록 人間事란 悽然한 건가// 내 弔意 貧寒으로 지극하오니/ 망령되어/ 미진한 생전 謀事에/ 그대 어찌 유감됨이 없으랴만……// 아침 해여/ 꺼적 덮인 위에도/ 따스히 비추시어/ 이미 간 주검을랑 冥目하게 하옵소서(1960.4.29)44~46쪽
「6월 街路樹에 기대서서」-따따따따따따따따따따따……// 첩첩 억눌렀던 학대의 분노가/ 정의의 혈탄으로 산화한/ 아아 4월의 그 충격!// 내 딸/ 내 아들 형제가/ <바리케이드>앞에서 쓰러져갈 때/ 겨레는 한 가슴으로/ 얼마나 원통하다 땅을 쳤던가?// 죽음은 피에 젖고/ 땅은 말이 없고// 자기의 빛과 열에/ 오직 순수한 태양의 진실을/ 그토록 거부했던 4월 이전// 몇몇 사람이 지극히 영화로워/ 간악한 인간들이 권리에 편승할 제// 자유도 인권도 빼앗긴/ 많은 사람은 기아에 떨었고/ 어떤 자는 억울히 생명마저 잃어// 깡통 찬 소년들의 황칠한 구걸은/ 행인 앞을 철없이 막아섰으며/ 애족 애국이란 구호의 발뿌리에/ 어진 민심의 유린도 가혹했어라// -따따따따따따따따따따따……// 아아 4월은/ 독재 폭력 앞에서/ 성난 사자들의 자유의 절규에/ 미친 바람같이 총탄이 휘몰아친 달// 양식과 농우 팔아 등록을 하고/ 피를 팔아 학비 벌던/ 민주 제단에 바치온 前衛의 희생 앞에// 허허 구천에 사모치도록/ 호곡한 4월 달// 보리 익는 남풍에 뻐꾸기도 울어울어/ 산천은 녹음으로 짙어가건만/ 자유 항쟁의 가슴에다/ 방아쇠를 당기면 元兇들과 走狗들은/ 그 핏발 선 憎惡/ 그 음모도 가신 이 땅 이 하늘 아래서/ 지금은 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고?// 민주의 거리 피흘린 태평로/ 改憲의 달 6월 가로수에 기대 서서/ 지나간 4월의 거룩한 殉義/ 젊은 그 생명들이 남기고 간 과업을/ 황우의 銳角으로/ 내 묵연히 겨냥해 보노니(1960.6.23)47~52쪽
「颱風(케리)號 -正義는 復讐欲의 진화…(니체)」中心示度 714.3mm/ 기압 952mb/ 풍속 27.7초m/ 풍향 동북// 북상중// -기상대의 태풍경보는 한창 육성으로 가뿌다// 선을 선이라 하지 않고, 악을 악이라 하지 않는, 정의의 미명으로 생을 구속하는 가치 표준을 역습하는 태풍<케-리>號는 드디어 어둠을 몰아 인간 지역으로 상륙// -기상대의 심장부는 공포의 사색// 남해안 일대 血潮 높이/ 만조면보다 5m 높고/ 주기 7초/ 서민은 합세의 태세/ 일부 도피, 뒤죽박죽// - 무전실 <SOS>는 깜박깜박 질식// 맹렬한 풍파는/ 港內 정박중인 해적선을 뒤엎고 3000톤급 密/輸船 4척을 침몰시키곤 전회하여 시가로 돌입/ 기존의 긍정이란 긍정을 모조리 때려 엎는 아비규환!/ 逆死의 아우성!/ 피투성이!// -일기예보탑 빨강 쌍등불은/ 초비상신호를 强打// 대노한 등압선은/ 벽돌집 철문을 무너뜨리고/ 불연속선을 동반하여/ 主副저압으로 병진// 2전/……/3轉// 목을 졸라/ 이상 진로로 迷走// -기상대의 마지막 보도는/ 맥이 빠졌다// 드디어/ 태풍 결과!/ 첩첩 암흑-// 여명은 머잖은 距離에 있다.(1960.7.31)53~57쪽
「금이 간 황우」황우는/ 답답한 하늘을 들이받았다// 아무런 反響도 없이/ 구름이 銳角에 와 감긴다// 황우는/ 산악같은 울음을 울었다// 아무런 음향도 없이/ 생활이 턱 앞에 와 강조한다// 황우는/ 대지를 걷어찼다// 황우는 자신 안으로 굴러 떨어지며/ 대지에 금이 갔다// 황우는/ 금이 간 언저리를/ 피맺힌 혀로 쓰윽쓰윽 핥는다. (1960.8.13)58~59쪽
「황우의 日課」4월에 흘린 피가/ 아직도 지맥으로 엉겨드는 鋪道를/ 황우는/ 흰 뚜껑상자를 끌고 간다// 꺼덕꺼덕……// 반추하는 아래턱엔/ 끈덕지근한 타액이 흐르고/ 꺼무럭거리는 양눈엔/ 눈꼽이 끼고/ 파리가 달겨 들고// 황우는/ 語尾가 분명찮은 누더기가/ 손을 벌리는 옆을 돌아/ 터덜컥 섰다// <당쑤바지>는 상자뚜껑을 제껴/ 갈쿠리로 번쩍/ 핏덩이를 찍어 어깨에다 메고/ 가게 안으로 나른다// 멍청한 황우도/ 그 핏덩이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1960.9.2) 60~62쪽
「어둠을 밀고 가는 행진」行進이 있다// 깃발도/ 군가도 없는/ 어둠을 밀고 가는 행진이 있다// 커다란 설움을 살라먹은 표정/ 그런 표정을 하고/ 어둠 아닌 짙은 어둠을/ 제마다 가슴으로 밀고 가는/ 행진이 있다// 가다가/ 전위는 구령 대신/ 주먹을 번쩍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行列이 따라/ 일제히 주먹을 높이 흔들었다// 바위가 길을 비켜선다/ 산이 주춤 물러 앉는다// 쩌벅쩌벅……/ 쩌벅쩌벅……// 전위는 또/ 검은 주먹을 높이 들어 전후로 흔들었다/ 행렬은 지체없이/ 넓적한 손들을 가슴에 얹고/ 심장에 이상이 있나없나를 확인한다.// 머잖아 무슨 행진이 전개될 것만 같다/ 둔중한 행렬의 발자죽 소리는/ 더욱 전후의 질서를 긴장시켜/ 눈빛과 눈빛을/ 가슴으로 이어간다.// 커다란 설움을 살라 먹은 표정/ 그런 표정들을 하고/ 행진이 간다.(1960.9.10)63~66쪽
「파리」賣肉床/ 노파가/ 깜박 졸았다// 卑小한 黑點이/ 변색된 肉塊에/ 재빨리 내려 앉았다// 警警警警-// 모든 것을 식욕으로 요약하여/ 餘念이 없는 놈// 殺意가 압축된 瞬// 반작용으로/ 흑점은/ 휙 외계에 비상하여/ 하계를 노려보며 숨을 돌린다// 노파가 또 깜박// 직감으로/ 흑점은 다시 그 육괴에/ 달겨 들었다.// 警警警警-// 엄연한 노파의 주름진 생존권이/ 조그만 그 흑점 속으로/ 警警 吸收된다(1960.9.30)67~69쪽
「내가 곤란할 때 남을 도웁시다」 -차라리 이름 없는 벌레로/ 고치안에 잠드는 번데기라면……// 의투깃을 세워/ 氷點 이하에서 서성대는 雪意에// <헐벗고 굶주린 동포를 도웁시다>// 구세군 장교는 총칼 대신에/ 떵그런 떵그런/ 종을 울린다// 자선남비를/ 기웃이 넘보는 곱추등 너머로/ 부산히 거리는 저물어가고/<景品付年末大賣出>아래서/ 어린 구걸이 발뿌리에 채인다// 징글벨/ 징글벨…/ 활개를 벌리면 바로 십자가/ 패전의 早旗보다 어두운 색깔로/ 인간 교차점에/ 내가 섰는가?// <내가 곤란한 때 남을 도웁시다>// 떵그렁 떵그렁/ 정말 종이 우는가?(1960.12.18)70~72쪽
「담뱃불은 혼자 타다 꺼졌읍니다」아기는 혼자 놀 수 없습니다/ 별도 혼잔 반짝일 수 없습니다// 나는 아기별// 모란이 피는 숨소리가 들려오는/ 유월의 하오/ 덕수궁 푸른 잔디밭에 홀로 누었으면/나는 아기별/ 혼자 놀 수 없습니다// 석조전 너머로 흐르는 구름이/ 내 마음 한 자락을 적셔옵니다// 고향은 멀고/ <靜伊>를 생각하여 둘이 놉니다// 귀밑머리/ 주근깨 핀 도두룸한 양볼/ 입술로 청포도를 깨물면/ 생생한 追憶// -흰 나비는 <정이>의 손수건// 담뱃불은 혼자 타다 꺼졌습니다// 그래도/ 아기는 혼자 놀 수 없습니다./ 별도 혼잔 반짝일 수 없습니다// 나는 아기별(1959.9.14)73~75쪽
「소년과 한 소년」<주를 믿는 자는 죽어서 천당엘 간다>// -소년은 들었다/ -한 소년도 같이 들었다// 남더러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그 분은 주를 믿어 빨리 천당에 갈 생각은 하질 않고 살아서 복을 받아 오래두고 잘 살려고 애를 썼다// <내가 국회의원이 된다면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 -소년은 보았다/ -한 소년도 같이 보았다.//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 분은 자가용을 타고 장관이 되고, 큰 기업체를 가져 정말 나라를 위해 바빴다// <아이스케에키를 구어 먹으면 대낮에도 별이 보인다>// -한 소년은 아이스케에키를 구었다/ -한 소년은 소년더러 바보라고 했다// 소년이 4월 광장에 쓰러져 병석에 누었을 때, 한 소년에게 아이스케에키를 구어먹으면 대낮에도 별이 보인다던 그 판잣집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했다// 한 소년은 오늘 그 소년의 무덤 앞에 한송이 붉은 꽃을 꽂으며 맹세한다.// <네가 자라면 반드시 정권을 잡아 너의 원수를 갚고야 말 게다>(1960.8.15)76~78쪽
「지렁이」비 그친 마당을 기어가는 지렁이의/ 머리 위에/ 가마귀의 그림자가 덮쳤다// 否定의 생리가/ 혈액으로 용해된다// 무료히 歪曲되는 지렁이의 외계엔/ 오후의 / 노랑나비가/ 橫斷한다// 기어가는 지렁이가 제발을 볼 수 없듯이/ 우리들은 우리들의 등 뒤엔 돌아가 볼 수 없구나// 지렁이의 발은 우리들의 등 뒤에 있고/ 우리들은 지렁이의 등 뒤에서 살고 있는 겐가// 벌레 먹은 잎사귀 흩어진/ 風媒花 밑에서/ 우리들은 다 같이 鷄口를 하고/ 지렁이가 기어가는 슬픈 노래를 불러주자// 이 때/ 지렁이는 우리들의 뱃속에서/ 우리들의 생명은 지렁이의 뱃속에서/ 어떻게 꿈틀거리고 있나/ 똑똑히 보아두자.(1960.9.24)79~81쪽
「장미」초록 잎 아래로/ 가시를 살짝 피해// 젖가슴을 사르르/ 치들어/ 받는// 純紅의 <키쓰>// 몸을랑 대지에 발돋움하고/ 눈을랑/ 영원으로 내리감았다.(1960.10.6)82~83쪽
「溺死體」아시아의 한 귀퉁이에/ 풍파에 밀린/ 익사체!// 산은 높고 바다는 푸르른데// 腐爛한 肉骸를/ 가마귀떼가 파헤치는/ 여름 구데기/ 냄새// 가마귀떼는/ 먹물 톳는 소리를 치며 흩어졌다간 몰려들고/ 몰렸다간 흩어지며 몰려 들었다// 끓는 구데기는/ 가마귀떼가 몰려들면 썩은 살 속으로/ 깨알같이 파고 들었다간 쏟아지고 쏟아졌다간/ 파고 들었다// 생명 있는 놈들이란/ 모두가 이렇게도 지지리 추잡하고/ 악착스러운 것// 산은 높고 바다는 푸르른데// 익사체를 파헤치는/ 가마귀떼/ 구데기(1961.1.9)84~86쪽
<탱자나무꽃>
제2시집
탱자나무꽃이 피는 한 언젠가는 肅이 이 詩를 읽을게다.
序
제1시집『黃牛』에서 先輩의 鞭撻로 뼈가 굵어 갈 것을 自負한 傲慢이 貧血하기 말이 아닌 것이, 二年餘의 그 惟悴해 간 모습이 바로 이『탱자나무꽃』의 제2시집 그대로임을.
사실은 그 동안 韓國的인 體臭를 觸感해 보느라고 내 딴엔 끙끙 앓아 보았으나 무척 힘에 겨웠음을 솔직히 고백하고 훗날을 다짐함이 한갓 미련에 그치지나 말았으면.
이 시집 ‘2’에다 실은 “薔薇”는 제 1시집에서 수록된 것이나 꽃을 읊은 시만을 한자리에 모아 보는 뜻에서 재수록했음도 허물되지나 않을는지.
僻寸에서 멀리 서울로 보내시어 나를 가르치신다고 골몰하신 어머님 생전에 제2시집의 얼굴을 相面해 드리는 것이 不敏의 所致로 이미 가신 지 1년이 넘은 오늘, 靈前에 감히 바치옵고 尙饗 再拜하옴을 어머님이여 笑納하시기를 비옵니다.
끝으로 빈약한 詩情을 항상 위로하고 격려하여 이 제2시집을 내게까지 용기를 복돋워 준 둘레의 온정과 자진하여 裝幀을 맡아 이 시집에 添花해 주신 崔東秀 형에게 감사드립니다.
1963년 11월 著者 識
차례
<제1부> 봄10/ 가을11/ 낙엽13/ 고향15
<제2부> 탱자나무꽃18/ 민들레20/ 목련화22/ 찔레꽃24/ 석류꽃25/ 봉숭아27/ 튜우립28/ 칸나30/ 달리아 32/ 코스모스34/ 장미35/ 들국화37
<제3부> 시집40/ 병풍41/ 소라껍질을 닮아가는 소녀 44/ 戀 48/ 雁 50/ 飢51/ 풍경53/ 選擧바람 56/ 계명성 57/ 폐허의 공장지대 58/ 戰災62/ 貧相64/ 黃송아지66/ 수난의 자세69/ 병든개72/ 울고 싶어지는 아침74/ 오월의 饗宴78/ 보리타작 83
「봄」나무 가지에/ 봄이 총총 망울지면/ 암탉은 둥우리에 들어 알을 품는다// 봄비 갠 들녘엔/ 백제의 후예가 쟁기에 소를 몰아 나가고// 종달이가 몇 번을 하늘 높이 울고나면/ 소녀는 나물광주리에다/ 노오란 봄을 꺾어 담았다. 10쪽
「가을」색옷을 갈아 입고 뜰을 내리서면/ 감나무 가지 높이/ 高麗하늘이/ 구름 한 점 없다// 東籬의 황국 옆에/ 암탉 벼슬이 곱게 붉었고/ 정지 앞 우물 가엔/ 새댁이 술쌀을 담근다// 한 해를 거두어/ 강마을 보리갈이가 끝나며/ 은행잎이 몹시 않던 새벽엔/ 된서리가 왔다. 11~12쪽
「낙엽」낙엽은/ 슬픈 사랑의 빛깔을 하고 있다// 기다리다 돌아서는/ 모습을 하고 있다// 낙엽은/ 앓는 가슴을 하고 있다.// 고풍한 여인이/ 치맛자락을 끄는 소리가 묻어 있다// 낙엽엔/ 못 다 흐린 눈물 자국이 있다. 13~14쪽
「고향」사서오경이 도배지가 된 마을/ 앞 개울이 解凍을 하면/ 아낙네는 족보보다 짙은 체취로/ 빨래터로 조잘조잘 모여 들었고// 남정들은 세 해 닭이 울기가 바쁘게/ 쟁기와 훌청이를 황우에 멍에하여/ 가야의 구겨진 田畓을 간다// 소년들이 꽃잎을 바다로 띄어 보내면/ 소녀들은 풀각시를 다듬어/ 초례청에서 홀기를 외라고 조른다.// 長長夏日에/ 五穀을 가꿔 가면/ 지붕마다 둥근 박은 영글어 가고// 빨간 고추널이 사이 사이엔/ 가지 높이 주렁주렁 감이 연들다// 쓰러지는 가문을 버린 子婦는/ 함박눈이 쏟아져도/ 고향엔 고향엔 돌아오지 않았다. 15~16쪽
「탱자나무꽃」봄우뢰 멀리 이리 울려 옴은/ 부푼 가슴을(/3집에서 행구분했음) 지녔기 때문일까// 화사한 빛깔이나 모양을(/) 탐내지 않음은/ 이웃을 너머다 보는 욕심이 없기 때문// 우르러 별빛에(/) 고운 볼을 부벼 봄은/ 높은 님 모시올 조심성에서 옵니다// 언제나 귓바퀴 단정히 하고/ 사특한 소리를 멀리 하여// 날카로운 가시로 꽃을 피운 뜻은/ 당신에게만 바치올/ 사랑이옵기에. 18~19쪽
「민들레꽃」봄은 시골 처녀들에게/ 노랑 저고리를 입히기를 좋아 한다.// 노랑 저고리를 입은 처녀들은/ 생활력이 강하다// 생활력이 강한 처녀들은/ 몸집이 통통하다// 몸집이 통통한 처녀들은/ 엉덩이가 바라진다// 엉덩이가 바라진 처녀들은/ 시집가서 생산을 잘 한다// 생산을 잘 할 처녀들은/ 봄이 오면 남 먼저 노랑 저고리를 입는다. 20~21쪽
「목련화」커어튼이 드리운 창 앞에 검은/ 나비 한 마리 파닥거리다가 미끄/ 러진 비탈길 위에 목련화 폈다// 삼태기 밑바닥같이 멀리 내려/ 앉은 항구엔 연기를 뿜는 외항선/ 옆에서 흰 병원선이 가슴을 앓고/ 있는데// 나비를 쫓다가 돌아오는 소년이/ 採虫網에 목련화의 향기를 담아/ 석계를 총총 밟아 현관 안으로/ 나르면 조촐한 미망인의 사연은/ 백지장 같이 여위어 갔다. 22~23쪽
「찔레꽃」뾰족한 손톱으로/ 젖꼭지를 꼭꼭 찔려// 몽글몽글 가시내가 가시내사……// 보리밭 머리에 요 가시내사/ 찔레꽃 폈다// 사월 남풍에/ 가시내사/ 질레꽃 폈다. 24쪽
「석류꽃」까투리 쫓는 쟁끼 울음/ 골을 쨍 울린 한낮// 기달피는 눈을/ 하늘 멀리 받돋움하고// 입술에 젖는 붉은 상념이/ 가지마다 똑똑 맺혀/ 석류꽃 폈다./ 장 익는 장독대에/ 석류꽃 폈다. 25~26쪽
「봉숭아」밤 동안 우물에 별빛이 고이면/ 누나는 정화수를 길었다// 정화수로 봉숭아를 가꾸어/ 한나절을 태극선으로 가리면/ 누나는 나비 앞에 꽃이 피었다// 칠석은 으레 비가 와야 하고/ 媒婆는 봉숭아 붉은 가정을 찾아 들었다. 27쪽
「튜우립」풍염한 유방으로 바쳐 든/ 내일로 충실하는/ 붉은 생명이여// 裕福한 따님의/ 황홀한 體臭ㄹ랑/ 갈미빛 의상으로 가리고// 일월은 당신을 중심하여 돌아가며/ 玉燕은 짝을 쫓아/ 고궁 처마끝을 피해 난다. 28~29쪽
「칸나」당신에게 바치올/ 전부이옵니다// 신방을 치룰/ 녹의홍상이옵니다.// 어쩌면 이렇게도/ 가슴 아리옵니까// 행복이란/ 바로 이런 건가 하옵니다// 포옹을 기다리는/ 입술이옵니다. 30~31쪽
「달리아」앙가슴을 비비대여/ 이만큼이니 뿕어오르랴// 달리아 꽃!// 淋漓한 입술에/ 은밀한 속삭임 있어/ 몸부림 있어// <키스 미 키스 미>// 의상이 미끄러지는 허리춤에서/ 태양도 眩氣하연/ 외면한다. 32~33쪽
「코스모스」몰락해 가는 가문에/ 전설처럼 소녀가 기대서면/ 코스모스는 슬픈 사연이 되어// 바다로 건너간 소년이/ 올해 들어 세 번을/ 咯血한 가을을 실망했다. 34쪽
「들국화」목이 긴 소녀는/ 이별이 있어야 합니다/ 향기가 슬픈 빛깔을 해야 합니다.// 화려한 봄보다/ 풍성한 여름보다/ 조촐한 가을을 좋아 해야 합니다.// 목이 긴 소녀의 이별은/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산모롱이에서 해야 합니다.// 들국화를 꺾어 들고 해야 합니다/ 낙엽이 지는 소리가 있어야 합니다// 들국화가 이울어도/ 슬프면 슬픈 대로/ 그런 대로 세월을 살아야 합니다. 37~38쪽
「詩集」古冊店에서/ 책갈피에 클로버를 끼어 둔/ <貝穀의 寢室>을 샀다.// 거죽엔 고운 손때가 묻었다// 두고 두고 펼쳐 보는 이 시집은/ 어느 미망인의 유산처럼 가난하다. 40쪽
「屛風」황우가/ 꽃그늘에 기대 누우면/ 목동은 등을 타고 앉아/ 피리를 분다// 嶺 넘엔/ 백발이 바둑을 두고// 長衫은/ 외나무다리를 건너/ 절벽 위를 간다// 물소리 거슬러 올라가다가/ 은사는 방초를 찾아/ 구름자락을 헤치고// 이화 흩날리는 강굽이에는/ 태공이 백구와 더불어/ 세월을 낚는다// 將蕪한 전원을 갈아/ 황혼에 소를 몰아 돌아가면/ 물동이를 인 아낙네의 걸음을 따라/ 黃狗가 꼬리를 치고// 성긴 죽림 높이/ 요순의 煙月이 멀리 비쳐온다. 41~43쪽
「소라껍질을 닮아 가는 소녀」개나리꽃을 꺾어 쥐어 준 소년이/ 마을을 떠나간 후로/ 소녀는/ 바다 기슭을 거니는 버릇이 되었다// 소녀는/ 소라껍질을 주워/ 바다로 던져 보냈다// 밤이 되면/ 소라 껍질은 하이얀 꿈이 되어/ 소녀의 가슴 속으로/ 되돌아 왔다// 소녀는/ 차츰 소라껍질을 닮아 갔다. 44~45쪽
「손금」- 비를 피해 처마 밑에 웅크리고 앉아 破寂으로 자기 손금을 들여다 보고 있는 품팔이 지게꾼의 초라한 모습이 세월이 흘러도 내 가슴 한 구석엔 인찍혀 있다.- 1. 들여다 봐도/ 들여다 봐도// 지울 수도/ 더할 수도 없는/ 가난한 손금 앞에// 삼월 산하/ 하루를/ 꽃비가 내린다. 2. 손금이 보기 싫어/ 손금이 보기 싫어// 주먹을 불끈 쥐면/ 손잔등의 검은 命脈/ 술 생각 한다. 46~48쪽
「戀」娑婆의 煩惱가/ 장삼에 묻어가는/ 척쭉도 이우는/ 어느 귀로에 서서// 울어 당신이 잊혀진다면/ 이 몸 범종되어// 스스로 가슴 터뜨려/ 허허 장천을/ 마냥 울겠다만 48~49쪽
「雁」창 앞에 꽃을 가꾸어/ 달빛에 보시던/ 당신 가시고// 마른 대갱이에/ 서리 맺히는// 새벽 외기러기 울음/ 寒天에 사무치다. 50쪽
「飢」납짝/ 엎어져/ 뼈다귀를/ 핥다가// 발뿌리에/ 짓밟혀// 혓바닥이 壓搾되고/ 창자가 터져/ 신바닥에/ 묻혀가는/ 敗殘의/ 飢 51~52쪽
「風景」1. 오동잎 벌레먹은 풍경이/ 황우의 뿔에 가 걸렸다// 휘저어도 떨어지지 않는 풍경을/ 울어 황우의 목이/ 수세미처럼 쉬었다. 2 태양이 꺼지면/ 億兆 星群이 의연 제자리에 빛나고/. 어둠을 사이하여/ 서로가 부르는 짐승들의 울음이/ 정작 인정보다 아쉽다 3. 고추잠자리 날름히 황우의 등너머/ 수수깡 울타리 밑 흰 사금파리를/ 저녁연기가 풀없이 덮어 긴다 4. 아침 햇살이 황토보다 짙은 황야에서/ 님을 찾는 황우의 울음이/ 큰바다 물길로 밀어/ 하늘 땅 끝에 가 메아리진다. 53~55쪽
「選擧바람」우국지사의 訃告 같은/ 벽보가/ 하꼬방에까지 나붙어// 민의는 저바리질 않았다// 지나가던 절름발이가/ 선거바람에 뒤뚱하며/ 녹쓴 깡통을 들이라는 걸/ 철없는 아이들이 희희 웃었다. 56쪽
「鷄鳴聲」창자를 뽑는/ 꾹꾸-/ 계명성// 날이 샌다/ 포구의 이 하루를 또 어쩌란 말가// 어제 저녁 이웃집 라디오 일기예보에선/ 오늘 하루를 비가 오며/ 해상엔 풍파가 높다 했는데// 아내여/ 제발 그까짓 자식새끼들이 불쌍하단 말만은/ 이제 제발 나에겐 하지 말아 다구나// 꾹꾸-/ 계명성은/ 갈갈이 찢어지는 내 육신의 울음임을. 57~58쪽
「폐허의 공장지대」찌익 철철 찍 찍 철철……/ 씨일 씨잉 싸 싸 싸앙……// 폐허의 공장지대에/ 검은 비가 들이칩니다/ 검은 바람이 들이칩니다.// 부서진 창문으로/ 무너진 담벼락으로/ 검은 비가 들이칩니다./ 검은 바람이 들이칩니다// 쓰러지다 버티고 선 연돌벽에도/ 씨잉 씨잉 싸 싸 싸앙……/ 검은 비가 들이칩니다/ 검은 바람이 들이칩니다.// 휘엉청 휘엉청/ 고가선이 가로 지른 먼 벌판에서/ 어둠과 추위로 몰아/ 황량한 지각 공장지대로// 검은 비가 들이칩니다/ 검은 바람이 들이칩니다.// 외곽에 둘러친 철조망 마름쇠에는/ 검은 비가 좌악 좍 찢어집니다./ 검은 바람이 좌악 좍 찢어집니다.// 찌익 철철 찍 찍 철철……/ 씨일 씨잉 싸 싸 싸앙……// 페허의 공장지대엔/ 육신이 찢어지는 소리가 납니다/ 肺腑가 무너지는 소리가 납니다. 59~61쪽
「戰災」砲聲 彈火에/ 시가는 산산히 파괴되었다// 아직도 타고 있는 건물과 전주/ 여기 저기에 쓰러진 시체/ 신음 소리 凄絶한데// 미아가 잿더미를 돌아나오며/ 어머니를 목메여 부르는 소리// 아아, 인간은 영원을 두고/ 서로가 원수로 몰아/ 이 시가에서만도/ 기하의 승패를 겨루게 되려는지// 어디선지 혈안의 黑狗 한 마리/ 씩씩거리며 시가로 달려 들어/ 핏덩이를 덥썩 휘휘 물어뜯는다// 물어뜯다간 때때로/ 아가리를 치들고 짖는 소리/ 백주에 쩌르릉 쩌르릉 메아리친다. 62~63쪽
「貧相」누른 수캐의 혓바닥을 빼어문 하오를/ 횡단하는 경인가도 가로수 그늘에서/ 신문지로 덮은 함지떡을 앞에 하고/ 분노도 저주(咀呪)도 잊고서 격정의 濁流가/ 휩쓸고 있는 조국의 한 자락을 이그/ 러진 여인이 아무렇게나 깔고 앉았다// 滑走하는 버스 택시 추럭 합승 군용/ 차 고급외인승용차……白棺을 싣고 가/ 는 달구지// 여인이 깔고 앉은 옆 자락에 손가/ 락을 빨다 지쳐 잠이 든 어린 입/ 술과 콧구멍에는 어디에서 추방당한/ 너댓마리의 蒼蠅이 통 虛飢症을 면/ 치 못해 하고// 이따금 賣淫婦의 임종보다도 어두운/ 조국의 중량이 여인의 빈상을 내려/ 덮으며 窒息한다. 64~65쪽
「黃송아지」황폐한 산야랑 累累 바윗돌이랑/ 가시덤불이랑을/ 삼동을 그을은 창문을 열어 젖히듯/ 이제 막 훨훨히 열어젖혀/ 황홀한 전망 훈훈한 흙 내음에/ 콧잔등을 비벼대는/ 삼월 황송아지// 갓돋은 뿔 끝에/ 햇살이 돌돌 감기며/ 黑瞳에 맑은 구름 감길락 말락// 이윽고/ 벅차오르는 가슴팍으로 푸른 바람을 안아/ 껑충껑충 뛰노라면/ 자국마다 새순 돋는/ 대지의 삼월 엉덩이// 동녘 미끈한 구릉너머/ 깊숙한 숲 속 始源의 물줄기/ 아지랑이 피는 벌판으로 흘러내려/ 따라 한나절을 우쭐대다가/ 돌아서 오며/ 강아지며 망아지며 노루아지며/ 엄머 엄머-/ 한자리에 불러 모우는// 황우의 목 쉰 울음을 닮아보는/ 삼월 황송아지 66~68쪽
「受難의 姿勢」태양이 직사하는 沙土에다 내 세운. 천년 형벌이/ 여기 있다// 태양의 검은 심장을 훔치려다가/ 화상을 입고 사로잡힌 사나이의/ 이 수난을 보라// 앉지도 눕지도 못하게/ 한 뼘 따에다 직립시켜/ 육괴가 철철 썩어내려/ 안골과 견골이 노출되고/ 까마귀가 내장을 쪼아 흩으려/ 파리떼가 덤비고 구데기가 득실거리는/ 半骸骨이 여기 섰다// 쫙쫙 살을 찢고/ 사지의 뼈를 꺾어/ 차라리 기름불에 태울지언정/ 인간을 앞에 하여/ 형은 어찌 이다지도 가혹해야 하는가?// 그래도 이 사나이는 죽질 않았다고 한다/ 불사의 의지는/ 천년을 酷되다 하지 않고 엄연히 버티고 서서/ 백골로 자기를 주장하여/ 끝내 미동도 하지 않는다// 살과 뼈가 다 썩어내리면/ 되려 이 따의 거름이 되고 물이 되어/ 제가 선 사토가 녹원이 될거라고 믿는/ 재림을 언약한 기독보다도 오만불손한/ 이 지독한 사나이의 수난의 자세가/ 여기 있다. 69~71쪽
「병든개」 고가선 멀리 바라뵈는 비탈길에/ 내가 앉아 웅크리면/ 핥다 버린 뼈다귀// 핥다 버린 뼈다귀에/ 비루먹은 털가죽을 아무렇게나 덮어서/ 버림 받은 병든개// 간악한 인간들의 모반과 패륜에/ 저주도 분노도 犬牙로 깨물어// 손을 짚어 네발을 하고/ 내가/ 窮- 짖는 소리/ 조국의 빈혈한 허파에 가 메아리지고// 인간에게 건 기대는/ 고가선에 걸리는/ 초생달만큼이나 빈약해 간다. 72~73쪽
「울고 싶어지는 아침-건국대학교 졸업 축시」-눈 바람이 쳤다/ 모진 추위가 휘몰아 쳤다// 이젠 봄이다// 가슴으로/ 멀리 창문을 열어젖히면/ 환히 트여오는 하늘이 있고/ 그 하늘 아래로 막 피어오르는 꽃봉오리가 있고/ 후끈히 닳아오르는 입김이 있다// 이젠/ 졸업……// 창가에 기대서서 팔짱을 끼고/ 휘파람을 불면/ 나는 푸른 깃발이 된다// 푸른 깃발을 흔들면/ 가슴이 일렁이는 바다가 보인다./ 그 바다에서 전해오는/ 푸른 회답이 있다// 곤색 양복에 붉은 넥타이를 하고/ 얼사 안아 안겨/ 종일을 딩굴라고 눈짓을 한다// 이젠/ 졸업……// 어어이 하고 부르면/ 어어이 하고 메아리지는// 가슴과 가슴과 가슴/ 하늘과 대지와 고향……// 어머니!/ 하고 그만/ 이 벅찬 아침을 울고 싶어진다.(1961.3.13) 74~77쪽
「오월의 향연- 건국대학 개교17주년 기념 축시」멀리 목을 빼어 부르면(멀리 가슴 터뜨려 부르면)/ 메아리 져 오는/ <조국이여!>// 대대로(지난 날) 國步도 艱難했던/ 오월 푸른/ <조국이여!>// (이) 조국(의) 하늘 아래 펼쳐진/ 장안벌판을 내달으며/ 내지를 주름 잡는/ 우리들은 <건대>의(사천여) 젊은 사자들// (<건국>의 이념을 포부하고서) 배움에 불 타는(붙은) 이 가슴(팎)으로/ (鮮血이 뚝뚝 듣는 태양의 심장을/)태양의 심장을 덥썩 안아 치켜 든// 오늘은 오월 17일(15일)/ (우리들의)배움의 전당 (<건대>의)열일곱돐(돌)/ 화려한 잔칫날// <誠信義>의 旗幟를/ 창공 높이 (올리고)바람에 날려 두고/ (테에프를 끊은 그 첫 출발의 감격이)선배의 가슴에서 후배의 가슴으로/ 연면히 전승된 약진 17년(‘에’ 삭제)/ 오늘 이 영광 이룩하였네(하였다)// 아아(오!) 우리들은 불의를 膺懲할/ 前衛의 鼓手// 조국의 바퀴가 어긋나갈 때마다/ 삼월 식전에서 선열을 배우고/ 사월 제단 앞에 분향을 하여/ 오월 조국을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은 나라의 동량/ 정의의 방아쇠// 발굽을 구르면 지축이 휘이고/ 불뿜는 포효엔 산악도 쩡쩡 운다// 아아(오!) 억센 주먹으로 (‘내’삭제)지르면/ 큰 한 쇠북 같이 은은히 (울려 올)울리는/ 팽창한 이 오월 하늘 아래/ 신록의 향연에(은 마련되었다.) 초대받은 우리들// 푸른 산맥을 채찍질 하랴/ 대해를 마시랴/)‘가슴마다 붉은 꽃을 꽂고’삭제/ 축배를 (‘높이’삭제) 들어/<성신의>의 기치를/ 오월 광장 앞에 드높이 올리고서/ 사천 건아의 출렁이는 희망(소망)으로/ (진리의 터전을 함선같이 흔들어/)장엄한 내일의 (재)출발을 예약한/ (피끓는 가슴의) 銅鑼를 (울리라)울리자// 신록의 향연이 長安湖畔에 마련된/ 오늘은 5월 17(15)일/ 일 일곱돐(돌) 잔짓날.(建大新聞) 78~82쪽
「보리타작」뚜들기자 뚜들기자 뚜들기자/ 여기다 여기다 여기다// 온 식구가 도리깨가 되어/ 온 국민이 도리깨가 되어/ 뚜들기자 뚜들기자 뚜들기자// 뚜들겨야 산다 뚜들기자 뚜들기자/ 뚜들겨야 잘 산다 뚜들기자 뚜들기자/ 온나라 힘을 다하여 뚜들기자 뚜들기자// 가난과 부정을랑 몰아 내고/ 조국을랑 굳게 다져/ 뭉글으자 몽글으자 몽글으자// 온 식구가 도리깨채가 되어/ 온 국민이 도리깨채가 되어/ 뚜들겨 뚜들겨 몽글으자 몽글으자/ 뚜들겨 뚜들겨 몽글으자 몽글으자. 83~84쪽
<주춧돌>
제3시집
序
골목길을 걸어갈 때 내 눈에 잘 띄는 것은 술집 간판입니다. 술을 좋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술장사는 아닙니다. 술장사가 비천한 직업이라서가 아닙니다. 그런 뜻에서 나는 시인이 아니라, 시를 좋아하기 때문에 시를 돈을 주고 사는 단골 손님의 한 사람임을 딱 잘라 미리 말해 둡니다. 오해가 있을까 해서.
제2시집<탱자나무꽃>을 낸 지가 어언 3년이란 세월이 흘러 갔습니다. 서당 개 삼년에 풍월 짓는다지만, 그 삼년 동안에 모은 작품이 바로 이 제3시집이다.
시는 현실을 비평하고 고발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현실을 비평하고 고발할 만큼 그리 영리하지도 용감하지도 못했습니다. 보고 듣는 귀와 눈이 둔하고 보니.
<황우>를 분만할 때 수고해 준 산파가 그 후로 돌 봐 주지 않았기 때문에, 산모는 <황우>를 양육하는데 현명치를 못하여, 외양이 비뚤어지고 사상이 궁색하기 짝이 없었으니, 이 <황우의 자화상>을 보게 된다면, 그 날의 산파는 오늘에 와서 과연 뭐라고 충고해 줄는지.
1.에 수록된 46편은 지면을 얻지 못하여 발표하지 못한 것이고, 3.에 수록한 2편은 제1시집, 제2시집의 책명이 된 시이고, 2에 수록된 11편만이 선배의 주선으로 잡지 또는 신문에 발표된 것입니다.
이 시집을 내는데 바쁘신대도 불구하고 장정을 맡아 준 金榮欣 화백과 물심 양면으로 협조해 주신 정연사 鄭秉模, 백조출판사 李庸濩, 백문사 殷世昌 사장님들에게 충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1967년 2월 20일. 저자 識
차례
<제1부> 주춧돌12/ 어부의 아내13/ 깊은밤14/ 칸나의 절정15/ 조춘16/ 노불17/ 노농 18/ 낮달19/ 사월낙화20/ 과부댁21/ 유성22/ 치차23/ 깃폭24/ 귀뚜라미25/ 포옹26/ 도약단계27/ 노농28/ 허수아비30/ 사랑31/ 정부32/ 추억34/ 파시35/ 까치36/ 어촌37/ 동백꽃40/ 백관42/ 나그네43/ 판자촌44/ 기린 45/ 고엽46/ 잃은사랑47/ 남사당48/ 까마귀의 울음소리49/ 가출50/ 유방52/ 대낮54/ 우중56/ 홍도화58/ 접시꽃60/ 해바라기 꽃 속에서 62/ 고궁뒷길64/ 당신의 작약꽃 옆에서 65/ 피해자67/ 크리스마스의 소녀69/ 칠월은71/ 독사73
<제2부> 8월은78/ 황우의 자화상80/ 팽이83/ 봄이오면85/ 고래87/ 성숙의 가을89/ 연92/ 북악94/ 오월의 향연97/ 장미밭에 든 황우102/ 황우의 언행과 뿔104
<제3부> 황우 108/ 탱자나무꽃111
「주춧돌」큰 싸움을 치르고 남은/ 폐허의 주춧돌을 안고/ 다시 놓을 자리를 찾아/ 나는 오늘까지 왔다. 12쪽
「어부의 아내」파도 치는 쪽으로/ 귀를 기울이고/ 등불을 켜 놓은 채/ 잠이 들었다. 13쪽
「깊은밤」-옛날 王舟는 햇병아리 같은 눈을 하고 꽃잎이 떨어지는 소리에도 곧잘 놀랐다- 조용한 여인이 흐느껴 울다가/ 지쳐간 시간의 방향으로/ 내일이 묻어오는/ 파도소리// 어제도 그저깨도/ 메꾸지 못한 채 펼쳐진 일기장 위에/ 주홍 항아리의 복사꽃이/ 또 한 잎 떨어진다. 14쪽
「칸나의 절정」앞가슴을 풀어헤치며/ 화끈히 단 입술이 더듬어 가는/ 칸나의 절정에서/ 빠알간 리봉이 땅에 꺾어진다. 15쪽
「早春」노랑나비에/ 봄빛이 묻어 오는/ 양지에서/ 나는/ 최초의 입맞춤을/ 생각하는 소년이었다. 16쪽
「老佛」천년 침묵에/ 백년 인생을 비관하고 있다// 일월은/ 덧없이 몇 억겁을 흘렀던가. 17쪽
「老農1」심고 거두느라고/ 궁색히 늙은 발로/ 조국의 어두운 그림자를 밟으며/ 소를 앞세우고 마실로 돌아온다 18쪽
「낮달」당신이 돌봐 주지 않으니/ 나는 이렇게도 외롭습니다// 당신이 낙서하다 버린 여백같이/ 아무런 값어치도 없는 표정이옵니다. 19쪽
「사월낙화」사월 낙화에/ 핏빛이/ 핏빛이 쏟아지는 소리 있다// 어머니를 부르는/ 어머니가 미쳐 나간 핏빛이 있다. 20쪽
「과부댁」며느리는 남편의 시체를 끌어안고/ 통곡하며 놓아 주질 않았습니다// 얼빠진 시어머니는/ 다리 뻗고 울 줄도 모르고// 온 동네 사람이/ 남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두고 두고 파돗소리는/ 과부댁 가슴벽을/ 죽어라고 두들겨 주었습니다. 21쪽
「유성」억고의 어둠/을 흘러/ 간 별/ 은/ 당신이 버리신 내 마음의 별이 옵니다. 22쪽
「齒車」큰 치차 잇발에 물려/ 역회전을 해야 하는/ 작은 치차는/ 언제나 자신을 감당치 못해/ 아찔히 제 속도 속에 몰입해 버린다. 23쪽
「깃폭」눈바람이 얼어 붙은/ 허공에 걸어 둔 이 깃폭은/ 다시 당신을 만나는 날 있으면/ 그 때 내 눈물을 가리울 손수건이옵니다. 24쪽
「귀뚜라미」귀뚜라미는/ 가을에만 우는 것이 아닙니다/ 여름에 우는 놈도 있습니다// 귀뚜라미는/ 밤에만 우는 것이 아닙니다/ 낮에 숨어 우는 놈도 있습니다// 여름에 우는 놈은/ 저와 같이 비관하라고 합니다// 낮에 우는 놈은/ 저와 같이 불평하라고 합니다. 25쪽
「포옹」발돋움 하여/ 흔들리는 젖가슴을 치받히십시오// 눈 감고/ 고추보다 매운/ 그 입술을 내미십시오// 두 손을랑/ 내 허리통을 꼭 감아 쥐시고// 오 당신은/ 한 마리의 나의 독거미/ 나는 당신에게 먹히는 숫거미가 될 겁니다. 26
「跳躍段階」나는 지금/ 도약단계에 있습니다// 발판이 어디냐고?/ 조국의 중심입니다// 앞은 어디냐고?/ 깜깜한 절벽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전신을 떨며/ 엉거주춤하고 있습니다. 27쪽
「老農2」보릿짚모자를 눌러 쓴 몸에서/ 철 늦은 오이지 냄새가 난다// 허리를 툭툭 치고/ 땀을 훔치는 이마의 주름이/ 밭 이랑보다 많다// 자주 눈꼽을 찍어 내는데도/ 眼晴이 흐리며// 오늘은 점심밥을 씹다가/ 잇발 하나를 뽑아 내었다. 28~29쪽
「허수아비」<누굴 허수아빈 줄 아나 봐>// 그렇습니다/ 바로 그 허수아비들이/ 종로 네거리를 활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쫓길 참새는/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누군 허수아비 아닌 줄 아나 봐> 30쪽
「사랑」사랑한다는 말이/ 듣기에 얼마나 쑥스러운 말입니까// 그러나 우리들은/ 사랑한다는 말에/ 얼마나 안타까이 가슴 조여 왔습니까// 짓궂은 사나이의/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에/ 일생을 망친 여인이 있었습니다. 31쪽
「情婦」손가락이 긴 투명한 손으로/ 나비의 날개짓을 하며/ 시가렛을/ 장미의 입술에 갖다 물린다// 흑진주를 캐는/ 저 눈길// 황금 이어링에/ 黑猫의 수염이 스쳤다// 권태로운 脚線을/ 허공에 한 번 내 던지며/ 전신의 탄력을/ 체경 속에서 비비꼰다 32쪽
「추억」 또 한 해가 다가고/ 눈이 내리던 밤에/ 하숙방 램프불 밑에서/ 일기장을 펼쳐 놓고/ 수복을 빌던/ 제야의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을 때/ 당신은 캬츄샤 수건을 쓰고/ 파도 소리를 끌고 나를 찾아 주었습니다. 34쪽
「波市」아가미를 잡힌 큰 물고기가/ 꼬리를 친다// 목청을 뽑는 아우성에/ 천시가 난다// 돛대들은 하늘을 쑤시며/ 물 위에 떨어지는 오줌줄기에서/ 녹빛이 난다. 35쪽
「까치」아침에 당신네 문전/ 홰나무가지에서 내가 운다고/ 반가운 손님이 찾아 올꺼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화투짝으로 일수를 떼어 보시지 그것도 거짓말/ 당신네 할머니의 할머니 때에도 거짓말이었습니다/ 내가 우는 것은/ 오로지 내 생명의 충동에서 오는/ 나의 주장이요 감정의 발로일 따름입니다. 36쪽
「어촌」모든게/ 오막조막하고/ 일그러지고// 물고기 썩는 냄새가/ 등천을 한다// 바다 멀리/ 하늘을 쳐다보는 표정들이/ 어쩌면 저렇게도 궁상맞을까/ 새댁의 빨강저고리가 곱기론/ 온 동네가 비치는데// 배꼽이 큰 아이놈은/ 물 때 오른 돌담 밑을 돌아/ 배를 수리하고 있는 아버지를 찾아 간다// 세월없이 가슴을 두들겨 주는/ 파도소리에 시달린/ 저기 돌아 나오는 과부댁 좀 보게나// 고기늘이의 파리 떼까지/ 사람을 없인 여기다니// 모든게/ 오막조막하고/ 일그러지고 37~39쪽
「동백꽃」바다의 푸른 사연을 앞에 두고/ 동백꽃이/ 저렇게도 진하게 붉게 피어 있으니// 철없이/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는 남해의 女情// 오 나의 신부여/ 그 고운 눈매로/ 저런 동백꽃 좀 보십시오// 물을 타는 해녀들이사/ 동백꽃을 두고도/ 일년 내내 동백기름이나/ 누가 한 번 발라나 봤을라고// 그래도/ 짠 바람 파도에 시달리는/ 매마른 풍토에/ 뿌리 깊이 박고 동백 꽃이 피었기/ 아 이 섬에도 따스한 생활이 있고/ 인정이 있음을 나는 똑똑히 보겠다 40~41쪽
「白棺」 노오란 배추꽃이 피어 있습니다// 곰봇짐 소년의 주검이/ 백관에 담기어/ 산모롱이 돌아 가고// 노오란 배추꽃이 피어 있습니다. 42쪽
「나그네」인생은 가는 것이다/ 수 없는 愛憎의 강을 건너// 唾棄하며/ 살아서 가고 죽어서 간다 43쪽
「판자촌」게딱지같은 판자집들이/ 어깨를 비비대었다// 일그러진 얼굴들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삐어져 나온다 44쪽
「기린」멀리 멀리 쫓겨 난/ 슬픈 표정을 하고/ 기린은/ 나를 외면한다 45쪽
「枯葉」청상과부로/ 들일을 하시며/ 늙으신 고모님의 얘기를 하고 있다// 고모님의 얼굴엔/ 저승꽃이 피어 있었다 46쪽
「잃은사랑」한 하늘/ 한 땅에서 살며/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사람 이상으로/ 나는 지금도 잃은 사랑을 생각하고 있다/ 저주하며 축복하며 47쪽
「남사당」북악 기슭에 사당을 짓고/ 가면을 쓰고/ 둥둥둥 북을 울리며/ 나는 계집을 홀리는 귀신이 된다 48쪽
「까마귀의 울음소리」 당신이 나를 불신한 후로/ 내 심장이 썩어간다고/ 귀는 자신도 없이/ 까마귀의 흉악한 울음 소리를/ 자꾸만 暴露할려고 한다 49쪽
「가출」살구꽃이 바람 없이 지고/ 읍내 장터에서/ 곡마단 나팔소리가/ 종일토록 들려 왔습니다// 나팔소리에 흘려 간/ 그 분 바른 가시나는/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나팔소리가 뚝 끊어진/ 그 이튿날도/ 영 돌아오질 않았습니다. 50~51쪽
「유방」황홀하여라/ 현기로와라// 충만하고/ 화사하기가 어쩌면……// 오 생명의 신비 소용돌이 치는/ 숨가뿐/ 동경의 봉오리// 너 앞에선/ 일월도 무색하며// 두 손으로 받들기에/ 천근 무게라니 52~53쪽
「대낮」섬돌 위에/ 남색 고무신/ 검정 구두가/ 나란히 놓여 있고// 담장 앞에/ 맨드라미꽃이/ 빠알갛게 피어 있고// 개도/ 마실가고// 대문은/ 꼭꼭 잠겨 있고 54~55쪽
「雨中」전봇대가 띄엄띄엄 선/ 뒷골목에/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경찰 찦차 한 대가/ 빗발 속을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젊은 여인이/ <여보!>하고 목 메인 소리를 지르며/ 찦차 뒤를 쫓았습니다// 바람이 빗발을/ 비스듬이 꺾었습니다// 짚차는 멀리 길모롱이로 사라지고/ 젊은 여인은/ 전봇대를 안고 쓸어졌습니다// 가로등에 저녁 불이 들어오며/ 여인의 등을 비췄습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56~57쪽
「홍도화」뻐꾸기는/ 저승길에서 우는 듯// 미나리꽝 옆 우물에서/ 물 긷는 새댁이/ 흔들리는 娥眉 위의/ 저 홍도화 보겠나// 정 두고 보면/ 세사가 백팔번뇌// 수향사 가는 尼僧이/ 징검다리 앞에서/ 돌아앉아 꽃을 보고 쉰다 58~59쪽
「접시꽃」어머니 저 장독대 앞/ 접시꽃 좀 보이소/ 붉고 흰 꽃이 정말 곱게 피었내요// 오래 친정엘/ 오지 못했던 마음에/ 꽃을 보아도 눈물이 쏟아질라 캅니다// 어머닌 요 몇 해 동안에/ 많이 늙으셨네요/ 머리도 백발이시고/ 오빠와 같이/ 저 꽃씨를 털어 드리면/ 농 속에다 간직하시던 생각이 납니다// 그 땐 어머니도/ 키가 훤출한 부잣집 며느리로/ 저 접시꽃같이 싱싱하고 고았잖아요. 60~61쪽
「해바라기 꽃 속에서」 이 가시나야/ 너는 귀가 먹었나/ 저 해바라기꽃 속에서/ 호탕한 남아가/ 황금 마차에 계집을 싣고/ 광야를 질주하는/ 채쭉 소리가 들리지 않니// 이 가시나야/ 너는 눈이 멀었나/ 저 해바라기꽃 속에서/ 엉덩이와 유방을 흔들며/ 두 손을 허공에 허우적거리는/ 황홀한 네 몸짓이 보이지 않니// 이 가시나야/ 너는 입도 없느냐/ 저 해바라기꽃 속에서/ 이글이글 끓는/ 숨이 턱턱 막히는/ 내 정욕의 불길을 보고도/ 한 마디 말이 없니. 62~63쪽
「고궁뒷길」 독버섯보다 진한 나의 고독이/ 노오란 은행잎을/ 고궁 뒷길에 깔아 놓고/ 당신이 먼 섬에서 온/ 그림 엽서, 얘기를 들려 주고 일어설 때/ 가로등에 막 불이 들어왔다. 64쪽
「당신의 작약꽃 옆에서」 여보/ 당신은 어디로 갔소/ 여기에/ 이 화사한 욕정의 충동을 버려 두고// 세상은/ 유월 한 달이/ 온통 개방한 비원인데/ 행여 도적이라도 들면 어떻할 생각이오/ 당신이 돌아 올 때까지/ 나는 이렇게/ 잇발을 드러낸 개가 되겠소. 65~66쪽
「피해자」 나는 무슨 죄목으로/ 누구한테서/ 무엇에 얻어맞은 지도 모른다// 뚫어진 심장에/ 바람이 세어 든다// 제빠른 까마귀 놈들은/ 죽음의 꼬리를 물어 날고// 眼球가 빠진 깊이에서/ 아가리를 치드는/ 흑사의/ 혀끝// 그/ 혀 끝에 닿는/ 아, 조국의 거리여! 67~68쪽
「크리스마스의 소녀」크리스마스의 소녀는/ 빠알간 베레모에/ 루비의 넉큐레스를 하고/ 커어턴을 걷어 젖혔습니다// 눈이 펑펑 쏟아지지 않아도/ 크리스마스 츄리엔/ 눈 아닌 눈송이가/ 소복소복히 얹혀 있었습니다/ 계모는 외출하고/ 소녀 홀로/ 피아노 앞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치다 지쳤습니다// 어쩌면 온 세상이/ 속임수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1966.12) 69~70쪽
「칠월은」칠원은/ 분수가 있는/ 로오타리를 돌아서 온다// 앞가슴을 드러내고/ 장미를 가슴에 꽂고/ 野獸의 눈을 하고// 공격적으로/ 생산적으로/ 탐탐히// 피 먹은/ 뱀이의 혀를 놀리며/ 엉둥이를 흔들며/ 칠월은/ 자신하며 온다. 71~72쪽
「독사」- 독사에 물렸을 땐 그 독사보다 먼저 대지의 흙을 집어 먹으면 독기가 가셔진다고 전해 왔다. - 독사 봐라/ 화냥기가 있다// 불 붙은 눈깔을 하고/ 강 건너 情人 보고 꼬리를 흔든다// 남남거리는 혀가 너무 가볍구나/ 사랑을 말하기에는// 하는 꼬락서니가 모략중상적이고/ 위선적이고 유혹적이다// 피 먹어라 피 먹어라 피 먹어라/ 똥 먹어라 오줌 먹어라// 곡직을 가리지 않고 국토를 횡단하는/ 징그럽고 매끄러운 저 놈의 잔등을/ 언젠가는 지지끈 꺾어 놓아야지// 우리네 조상들이/ 너 독아에 걸렸을 땐/ 너보다 먼저 대지의 흙을 집어 먹었단다.(1966.5.31) 73~75쪽
「8월은」8월은/ 여성의 달/ 암내 낸 고양이의 눈을 하고 있다// 불 붙은 욕망의 숫돌에다/ 발톱을 예리히 갈며// 폭양 아래서/ 阿片 먹은 소리로/ 언제 공격해 올지// 나는 단단히/ 전신에 독이 올라 있어야 한다// 반격할 땐/ 잔인히/ 피를 보고야// 8월의 당신이/ 황활한 비명을 지르는 순간/ 나는 죽음의 관념을 포착해 버리겠다.(시문학) 78~79쪽
「황우의 자화상」 미련하기 소라지만/ 남 달리 큰 코에/ 정말 소만큼 콧대나 세었더라면// 날카로운 뿔을 생각하면서도/ 행동이 무디기 부러진 보삽 같아/ 두 발의 행보가/ 네 발의 안정을 얻지 못한다// 말이 조리 없으며/ 명예나 재물을 탐낼 줄 모르는 주제에/ 워낙 술을 좋아 하는 천성이라/ 주책없이 남의 부인을 몰라 보며// 입술이 두툼하여 음식을 여물 씹듯/ 웃음이 소를 닮아 싱겁기 말이 아니니// 한번 이성을 사랑하다가 놓진 후로는/ 뚫어진 심장을 메꾸지 못하여/ 무작정 집을 뛰쳐나가는 버릇이 있다// 부지런하고 온순하고 불평하지 않고/ 타락하지 않고 비관하지 않고 아부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고 이유 없이 반항하지 않고/ 주인을 배신하지 않는 소라고 하지만/ 그 소에게서 난 몇 가지 미덕을 배와/ 자신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가난한 생활과 혈육과 나를 가르치느라고 골몰하신/ 부모님과 동강 난 국토를 생각하다가/ 때때로 남향하여/ 음무-하고/ 목 쉰 울음을 터뜨려 본다.(漢陽誌) 80~82쪽
「팽이」 채는 가차 없이/ 내 육신을 친다// 내 생명은/ 내 육신의 회전으로만 지탱한다// 遲緩은/ 의욕의 해이// 나는 내 생명을 연소시키는 외의/ 일체의 잡념을 거부한다// 쳐라 쳐라 쳐라……// 내 육신은/ 천축과 지축을 맞물어 회전하고/ 일월은/ 내 육신을 축으로 회전하여 立命한다// 내 회전의 정지는/ 모든 뜻의/ 종착이요 허무이다.(文湖誌) 83~84쪽
「봄이오면」 핏대 선/ 무지한 발뿌리에/ 억압된 땅에도/ 봄이 오면/ 풀과 나무가 자라고/ 꽃을 피운다// 고래등같은/ 검은 그림자에/ 억압되고 있는/ 나의 가슴에도/ 봄이 오면/ 풀과 나무를 자라게 하고/ 당신의 붉은 입술을/ 장미꽃으로 피게 하겠다// 그리고 나는/ 그 장미꽃을 입에 물고/ 태양을 향해 달리는/ 한 마리의 숫표범이 되겠다.(한글문학) 85~86쪽
「고래」 바다여/ 당신도 눈이 있으면 좀 보십시오// 수평선을 무너뜨리고 오는/ 저 괴물을/ 저 놈의 부침하는 꼴을// 으르렁대고 잇는/ 시꺼먼 저 놈의 목소리// 물을 뿜으며/ 맥진해 오는 저 놈 앞에선/ 새우새끼 한 마리도 견뎌나지 못한다// 바다여/ 당신이 온통 그 놈을 위하여/ 둘러싸고 잇는 것 같아서야// 분노의 이빨을 세워/ 그 놈의 내장을 파헤쳐 보십시오/ 그 놈의 탐욕이/ 얼마나 더럽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니.(廣場誌) 87~88쪽
「成熟의 가을」 순여야 정말 니 어얄라카노/ 저 푸른 하늘 아래 오곡이 무르익고/ 과수원 능금알이 이렇게 빠알갛는데// 내일 모래면 추석/ 가슴이 그만 터질라 안카나// 보래 순녀야/ 이 산과 들은 니도 알다시피/ 우리네 조상들의 피와 땀과/ 그 억센 손 때가 묻은 천량 옥토가 아닌가베// 대대로 갈고 거두어 아들 딸 낳고 살며/ 추석 명절 때가 제일 좋다 안카다나// 순녀야 정말 니 어얄라카노/ 남저고리 홍치마에 연지 찍고/ 저 황금 벌판을/ 표범같이 주름잡고 싶지 안니// 강물은 천년을 흘렀다지만/ 청춘은 잠깐이라는데// 미추룸한 니 머리채가/ 내사 두고 못 보겠다// 황우의 울음이 메아리치는/ 성숙의 이 가을을/ 순녀야 정말 니 어얄라카노(1964.9 農協新聞) 89~91쪽
「연」당신이 나에게 쥐어 준 것이란/ 팽팽한 이 한 올의 줄 뿐// 행여 놓칠까 봐/ 가슴과 손이/ 이렇게도 떨고 있는데// 어쩌면 자꾸 바람을 안아/ 당신은 그렇게도 멀리/ 비상하려고만 하십니까// 줄이 끊어진다면/ 끊어진다면……// 한 올의 전율을 잡고/ 울고 있는/ 당신에의 이 집념을/ 언제까지 두고 시험하시렵니까// 당신을 바라보기엔/ 정녕 하늘이 너무 멀구나(宗敎界) 92~93쪽
「북악」 일식을 처음 본 일이 있은 후로 사생아 용녀는 해를 잡아 먹는다는 그 불개 생각을 하기만 하면 안색이 악화했다// 용녀가 빈약한 얼굴에다 창녀의 지분을 바르고 비관하고 저주하고 반항하고 실망하고 진통하고 입술을 깨물고 哄笑하고 자폭하며 천둥을 쳤다.// 그러나 용녀는 누가 물어도 죄의 열매를 따먹었다는 기억이란 손톱만큼도 없다고 할 밖에// 용녀가 娼街에서 쫓겨난 것은 푸줏간 갈고랑쇠에 거린 고깃덩어리가 썩어가는 고독한 달밤이었다// 국외에서 돌멩이에 쫓기며 치맛자락을 웃통을 찢기며 蹶起하며 오줌을 싸고 비명을 지르고 천 번을 몇 천 번을 실소하고 대문 벽에다 唾棄……// 마지막에 신이라도 혹 숨어 있을지도 모를 쓰레기 통을 뒤지다가 그만 퍽 꺾어지며 미쳐 숨이 끊어지기도 전에 미행하던 늙은 할미는 용녀를 깔고 앉아 입술을 까고 하나 밖에 없는 그녀의 금닛발을 돌맹이로 쳐 파산했다// 북악 기슭에서 포복하고 북악 기슭에서 어미를 빼앗기고 북악 기슭에서 실신한 북악은 끝내 그 용녀 하나를 품안에 받아 줄 여지가 없는 조국의 유산이었을 뿐(시문학) 94~96쪽
「장미밭에 든 황우」 황우가/ 장미밭에 들었다// 장미꽃을/ 지근지근 씹는다// 실박한 네 발이/ 대지의 무게를 딛고/ 눈에 동해물이 글썽글썽한다// 이윽고/ 황우의 내장이/ 해돋이의/ 새빨간 장밋빛으로 변해 간다.(한양지) 102~103쪽
「황우의 언행과 뿔」나는 말이 어눌하다고 생각하는데/ 말이 많다고 한다/ 태양을 거꾸로 삼킨 복장이라고 했더니/ 말에 독기가 있다고// 나는 행동이 우둔하다고 생각하는데/ 행동이 과격하다고 한다/ 어둠을 밀고 가는 대열에 뛰어 들었더니/ 행동에 탈선이 있다고// 나는 뿔이 용맹없다고 생각하는데/ 뿔이 날카롭다고 한다/ 뿔을 감추느라고 하다가 흐르는 구름에 스쳤더니/ 뿔에 살기가 있다고// 재갈을 물고/ 가쇄를 채우고/ 뿔에 白布를 덮어/ 낙동강 건너가 곰곰이 생각해 봐야겠다(한양지) 104~105쪽
<책 뒤에> 시를 쓴다는 것이 技術이기는 하지만 그리 별난 기술은 아니다. 天分이니 靈感이니 하는 오랜 관념, 면허를 요하는 직업이라는 새로운 관념에의 집착이 남아 있는 한, 창의성의 자유로운 발로가 저해되는 기술이다. 우리는 누구나 시인이며, 시인은 모든 사람과 같은 의미에서 시인인 한에서 생명에 넘친 시는 탄생한다. “큰 싸움을 치르고 남은/ 폐허의 주춧돌을 안고/ 다시 놓을 자리를 찾아/ 나는 오늘가지 왔다” 우리가 시인에게 기대하는 건 이러한 叡智이다. 시는 생활에서 시작되나 생활을 단순하게 재현하는 푸념에 그치지 않는다. 그 집약적인 의미를, 모두가 다 느끼고 있지만 모두가 다 잊고 있는 의미를 튼튼히 틀어쥐고 警鐘을 울려야 한다. 일상적인 분망과 피로는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인을 필요로 한다. 1967년 2월 趙東一 識 114~115쪽
<노루아지>
제4시집
차례
<제1부> 노루아지8/ 아기의 평화10/ 성욱이 미워12/ 뿐도14/ 태양을 찾아가는 소년 16/ 옛날에 옛날에18/ 할아버지 안할거야20/ 할아버지 좋니22/ 신호등24/ 내 고향 창녕의 이름과 함께라면25
<제2부> 태양은 져도32/ 만추도34/ 멍텅구리병36/ 철새38/ 뻐꾹새 울고 있다 40/ 침묵의 말씀42/ 화왕산46/ 울고 있는 난48/ 망종50/ 산이 좋아 물이 좋아52/ 구름은 구름54/ 미소56/ 서울의 백주58/ 설악산60/ 여인찬62/ 천하대우64/ 이리의 눈65/ 풍경일 수 없는 噴水68/ 수향사71/ 지금은 우중74
<제3부> 시에 있어서의 상상력 76
「노루아지」어메야 어메야/ 나 혼자 우야라카노// 풀국 풀국 풀국새야/ 넌 와 청성맞게 울고 있지// 사람 냄새가 싫어/ 화약냄새가 죽어도 싫어// 방울새야 방울새야/ 나하고 놀자// 어레 산다화꽃 좀 보래/ 산다화야 산다화야 8~9쪽
「아기의 평화」신부님/ 제발 그 종소릴/ 삼가해 주셔요/ 방금 우리 아기가/ 잠이 들었어요// 아기의 평화가/ 그 종소리로/ 깨뜨러진다면// 그땐 신부님/ 어떻게 하시겠어요. 10~11쪽
「태양을 찾아가는 소년」태양을 잃어버린 소년이/ 태양을 찾아/ 하이얀 외줄 길을/ 우쭐우쭐 걸어간다// 가도 가도/ 하이얀 외줄 길/ 풀 한 포기 볼 수 없고/ 나비 한 마리 날지 않고// 끝없이 뻗어 있는/ 하이얀 외줄 길/ 바람 한 점 없고// 가다가/ 휘파람을 불고/ 무지개도 휘두르며/ 하이얀 외줄 길을/ 우쭐우쭐 걸어간다. 16~17쪽
「옛날에 옛날에」성욱아, 옛날에 옛날에/ 산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했는데/ 거북이가 일등을 했대/ 할아버지/ 거 거짓말 아니지, 그렇지?// 성욱아, 옛날에 옛날에/ 알을 품겠다고/ 하도 어미거위가 성가시게 구니까/ 화가 난 주인이 도끼로/ 거위 목을 쳐 버렸대/ 그래도 목이 잘린 어미거위는/ 날개를 퍼득이며/ 알이 있는 쪽으로/ 비틀비틀 몇 걸음 걸어가다가/ 퍽 스러졌단다/ 할아버지/ 거 거짓말 아니지, 그렇지? 18~19쪽
「할아버지 안할거야」할아버지/ 할아버지 안할거야/ 왜 성욱아?/ 할머닌 엄마한테 갈 때 신으라고/ 구두 사주고/ 할아버진 안 사주었잖아/ 할아버지 보여줄까// 요 놈/ 그럼 나도 성욱이 안할거야/ 왜 할아버지?/ 넌 할머니하고 마포 형한테 가면서/ 할아버진 안 데리고 갔지않아// 그럼 나도/ 할아버지 안할거야/ 왜 성욱아?/ 할머니가 날 키웠지/ 할아버지가 날 키웠어? 20~21쪽
「할아버지 좋니」수진아/ 할머니 좋니, 할아버지 좋니?/ 할머니 좋니/ 요 년/ 할아버진 수진이가 미워/ 쮸쮸바 안 사줄거야// 수진아/ 할머니 좋니, 할아버지 좋니?/ 할아버지 좋니// 암 그렇고 말고/ 할아버지도 수진이가 좋니/ 요 다음 수퇘지 새끼 놓으면/ 쮸쮸바 사줄게 22~23쪽
「신호등」 빨강 불이 켜졌다/ 가야 하는데/ 파랑 불이 켜졌다/ 어디로 갈까/ 노랑불이 켜졌다/ 돌아서 가자 24쪽
「내 고향 창녕의 이름과 함께라면」 누가 제 고향 자랑이 없을까만/ 나는 내 고향 내 산천이/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라// 길가에 버려진 돌 하나에도/ 농부가 갈다 둔 한 줌 흙에도/ 나는 조상님들의 숨길을 느낀다// 내 어릴 적 백조의 전설과/ 풀국새 전설이 애련했고/ 굽이 굽이 낙동강 나루터엔/ 오가는 정이 풀꽃처럼 피고 졌다네// 아, 화왕산/ 사철 푸른 서기 안개처럼 끼어 있고/ 까막까치 울음 소리에도 뼈가 있다던/ 우리 고장의 主山/ 위엄 있는 그 풍모는/ 우리 고장의 기상// 비사벌의 옛 고장/ 창녕은 제 2의 경주// 만옥정 비탈에 선 진흥왕 척경비와/ 술정리 동 3층 석탑은 국보로 이름이 높고/ 보물 관룡사 대웅전, 약사전, 석조여래좌상을/ 비롯하여/ 송현동 석빙고 석불좌상, 봉선대 석가여래/ 좌상, 교동 탐금당 치성문기비, 술정리/ 서 3층 석탑이 있으니// 사적 화왕산성은/ 임란 때 곽 재우 장군의 싸움터로 유명하고/ 구천삼지가 있었다는 산정에는/ 창녕 조씨의 득성비가 서 있다// 그리고 사적 교동 고분군은/ 비사벌 고관들의 무덤이었다는데/ 일정 때 지각 없는 인간들에게/ 도굴되고 밭으로 일구어져/ 지금은 수십 기만 남아/ 뜻 있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아, 내 고향 신라 비사벌의 옛 고장/ 나는 만옥정 박물관을 찾아/ 한나절 슬기롭고 순박했던/ 조상님들의 그 얼을 새김질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괴어 넘친다// 누가 제 고향이 없을까마는/ 나는 고향 창녕의 이름과 함께라면/ 내일 고향이 문둥이의 지옥이 된다 해도/ 나는 나는 고향에서/ 고향에서 살고 싶어라. 25~29쪽
「태양은 져도」 태양은 져도/ 다시 떠 오른다/ 아침마다/ 우리 겨레의 가슴 가슴에서// 우리 겨레의 입에서/ 태양의 이야기가 끊어지는 날/ 그 날이 오면/ 우리들은/ 태양이 진 것이 아니고/ 태양은 죽었노라고 할 것이다. 32~33쪽
「멍텅구리병」 옛날 옛날 龍石골에선가/ 머루랑 다래랑/ 빼뿌쟁이 돼지감자 캐서 먹으며/ 멍텅구리/ 멍텅구리 할아범이 살고 있었다네// 자라 등 같은 손등으로/ 허리를 툭툭 치며/ 문득/ 문득 쳐다보면 회청색 하늘 빛// 먼 훗날/ 고려 옹기장이/ 그 회청색/ 회청색 하늘 빛을 짓이겨/ 멍텅구리/ 멍텅구리병을 하염없이 빚었다네 36~37 쪽
「철새」항시 날개짓을 하며 몸을 건사하여/ 飛翶을 잊어서는 안되며/ 눈동자를 맑게 가다듬어/ 향방을 바로 잡는 시력을 길러야 한다// 날개가 튼튼하지 못해선/ 기류를 타고 구름을 주름잡으며/ 망망 대해를 넘어갈 수가 없고/ 시력이 약해선/ 표지 하나 없는 허허 長天에서/ 향방을 잃어 목숨을 앗기게 되니// 와야 할 때 와서/ 가야 할 때 떠나야 하므로/ 집념이나 미련은 나에게 禁物//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도/ 목타는 기갈도 견뎌내기 위해/ 나는 나의 전신을/ 비정의 칼날로 갈고 갈아야 한다. 38~39쪽
「뻐꾹새 울고 있다」뻐꾹새 울고 있다/ 萬朶靑山/ 돌아가자/ 돌아가자고 울고 있다// 산은 산으로 돌아가고/ 물은 물로 돌아가자고/ 뻐꾹새 울고 있다// 옥은 옥으로 돌아가고/ 인간은 인간으로 돌아가라// 무량 억겁/ 나무지옥대보살/ 뻐꾹!/ 뻐꾹! 40~41쪽
「침묵의 말씀」깊은 산 바위 위에 앉아서/ 침묵의 말씀을 들었다//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광화문 네거리 소음 속에서/ 침묵의 말씀을 들었다//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잠자리에 누어 눈을 감고서/ 침묵의 말씀을 들었다//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어제도/ 오늘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42~43쪽
「화왕산」 감히 한 치를 높혀서/ 말할 수 있으며/ 한 치를 깎아서 말할 수 있을라고// 먼 먼 어느 何日에/ 다시 한 번 충천할지도 모르는/ 미진한 열화를/ 속으로 속으로 깊이 다스려/ 몇 천 몇 만년을/ 맑은 정기/ 이름 없는 풀꽃 하나에도/ 흐린 적이 없으니// 낙동강 안고 도는 기름진 고장/ 비사벌의 진산/ 아, 화왕산 46~47쪽
「울고 있는 蘭」<蘭>이 울고 있다/ 소리 없이 울고 있다// 적막 강산/ 촛불되어/ 오열보다 짙은 울음을/ 하염없이 울고 있다// 새도 마음 놓고/ 날 수 없는 하늘 아래서// <난>이 난일 수가 없어/ 촛불되어 울고 있다// 촛불이 <난>이 되어/ 적막 강산 울고 있다. 48~49쪽
「芒種」옛사람들이/ 망종날 천둥이 치면/ 농사가 흉년이 들고 불길하다고 했다// 보리 가을이/ 망종을 고비로 물러나게 되고/ 본격적인 벼농사철로 접어든다는데/ 중앙 관상대에선/ 당분간 비가 내릴 가망이 없고/ 가뭄이 계솔 될 거라고 한다// 저수지 바닥이 나고 낙도에선 마실 물이 달려/ 벌써부터 곤경을 치르고 있다는데// 아침 밥상 머리에서/ 옹색한 소릴 하는 아내에게/ 넌지시 외면을 하며/ 능청스레 말해 주었다/ 오늘이 망종이니 제발 천둥이 치지 말아야 할 텐데/ 금년 고향은 보리가 풍년이라던데. 50~51쪽
「산이 좋아 물이 좋아」세속을 털고 산을 찾아가니/ 산이 반겨주고/ 물을 찾아가니/ 물이 반겨준다// 노송은 노송이어서 좋고/ 수석은 수석이어서 좋다/ 종일 산에서 노니/ 뼈 속에까지 산내가 배고/ 종일 물에서 노니/ 마음 碧水에 풀려 수심이 깊어진다. 52~53쪽
「구름은 구름」희고 검음이/ 원래 본색이 아닌데/ 희면 희다 하고/ 검으면 검다고 한다// 멈추고 흐름이/ 본시 다를 바가 없는데/ 멈추면 멈춘다하고/ 흐르면 흐른다고 한다// 때로는 비를 쏟으며/ 뇌성 번개를 치고/ 벼락을 때림이/ 일말의 私도 없는데/ 분별하여 天意라고 한다. 54~55쪽
「미소」예토 둥근 연화좌 위/ 흘러 내린 가는 허리 아래/ 옷주름 휘감아 번뇌// 오른 발/ 왼편 무릎 위에 얹어/ 半跏坐/ 한 손 턱을 괴고/ 아미 눈뜨는 듯 내리감고/ 깊은 사유에 잠기셨다// 삼산관 고이 얹어 童顔에/ 고즈너기 머금은/ 古拙한 미소/ 더 없이 맑은 慈悲/ 감추이듯 비치어라. 56~57쪽
「서울의 白晝」쨍쨍한 태양이 직사하는/ 서울의 白晝는/ 도약하고 있다/ 질주하고 있다// 강렬한 생명이 소용돌이치며/ 거창한 진통을 앓는다// 서울의 백주는/ 땀을 뻘뻘 흘리며/ 숫표범 눈초리로// 연인을 쫓는다/ 고층 빌딩 숲으로 달아난다// 오늘도 서울의 백주는/ 세계를 포옹하고 回轉하며/ 상승한다. 58~59쪽
「여인찬」하오의 여인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 우아하고/ 애린하고/ 그리고 욕탕에서/ 바스타올로 앞가슴을 가리고 나오는/ 그 수줍음이 몸에 젖어 있어야 한다// 곡절 있는 육체의 표정은/ 암내 나는 암노루처럼/ 눈매엔 질투의 불길이 일고// 도툼한 입술의 소망이/ 눈 속에 피는 매화처럼 맵고/ 귀밑 머리 찬바람이 번뇌롭게 62~63쪽
「천하대우」 서역은/ 억만리길// 대광주리 한 손에 들고/ 땅에 흩어진 복사꽃잎/ 고와서 번뇌/ 한 잎 두 잎 주워 담고 있는/ 천하 바보/ 天下大愚 좀 보겠나. 64쪽
「이리의 눈」 한 마리 이리의 눈이/ 적을 정확히 찾아내어/ 공격해 갔다/ 죽은 것은 적이 아니었다/ 죽은 것은 이리의 눈이었다// 또 한 마리의 이리 눈이/ 또 한 마리의 이리 눈 속에서/ 눈을 겹쳐 뜨고/ 적을 정확히 겨냥하고/ 공격해 갔다/ 죽은 것은 적이 아니었다/ 죽은 것은 이리의 눈이었다// 또 한 마리 이리의 눈이/ 또 한 마리의 또 한 마리의 이리 눈 속에서/ 눈을 겹쳐 겹쳐 뜨고/ 적을 정확히 겨냥하고/ 공격해 갔다/ 죽은 것은 적이 아니었다/ 죽은 것은 이리의 눈이었다// 수없이 죽어 간 이리의 눈이/ 하늘로 올라가서/ 별이 되어 반짝인다. 65~67쪽
<제3부> 시에 있어서의 상상력 - 童詩를 中心으로. …그냥 운이나 가락을 주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으며, 또한 쉽게, 그리고 재치스러운 조각난 어귀만 가지고 어린이들의 新鮮하고 생생한 상상력의 성장을 눌러버리고 만다. 시의 경우 어린이들의 상상력은 어린이의 이해력을 뛰어 넘을 수 있으며, 마음의 고양은 도저히 이성이 따라갈 수 없는 데까지 어린이를 데려간다. 어린이는 오로지 한 가지만 배우면 된다. 그것은 기쁨이다.…(리리언 H 스미스<아동문학론 제7장 詩>에서)
종종 성인 동시를 대할 때마다 나는 그 동시인이 어린이들에게 주는 동시라는 안이한 생각에서 어린이들의 세계를 재미있고 재치 있는 말재주로 어린이들의 흉내를 내어 쉽게 쓰는 것을 동시로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독자에게 아무런 미적 감흥도 공명도 주지 못하며, 상상력의 성장도 조장시킬 수 없는 사이비 동시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 동시인 중엔 동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고 재래의 모방이나 정체 상대로부터 탈피하려고 노력하며 동시란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주제의식으로 창작을 하고 있는 예가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아이들이 떠나간
빈 교실은
썰물이 씻어간 바닷가
먼 파도에 귀를 모으며
선생님은
귀여운 조개를 줍는다
커텐주름에서
꽃병 밑에서
고운 향기로 살아오는
맑은 웃음들
‘저요, 저요, 저요’
고사리 손의 물결 속에
방실방실 떠오르던
작은 얼굴들
金鍾祥씨의「선생님」동시의 일부이다.
귀여운 어린이들이 하루의 공부를 마치고 돌아간 텅 빈 교실을 ‘썰물이 씻어간 바닷가’로 비유하여 마음의 허전함을 표현하는 상상력과 고사리 손을 치켜들고 ‘저요, 저요’ 하며 금붕어 같은 입을 놀리고 있는 작은 얼굴들을 머리 속에 되살리며 하루를 되돌아보는 작자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공명을 주고도 남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눈을 감으면
끝없는 물결 소리
내 작은 인어들은
어느 수평선을 가고 있을까?
이것은 정말 아름답고 조용한 상상력에서 빚어진 표현이다.
이런 상상력의 표현은 오랜 시일을 두고 어린이들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해온 현직교사가 아니고 선 쓸 수 없는 시라 해도 過讚이 아닐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아이들의 옷깃을 고치듯/ 비뚤어진 책상을/ 바로 놓는다.’는 선생님의 태도와 사랑은 어린 자식을 사랑하는 어버이의 사랑과 버금간다고 할 수 있다.
상상력이란 바로 사랑이라고 한 시인이 있다(일본 本原孝一)
아기가 손가락을 다쳤을 때 어머니가 아기와 같이 아파하며 달래는 것을 자기가 손가락을 다친 경험에서 그 어린 아기의 고통을 상상하여 자기 경험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만일 그 아기가 보도 못한 남의 집 아기였다면 그 어머니는 그렇게 안타까이 생각하지 않고 간과해버릴 것이다. 그 어머니와 아기를 결부시키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의 자각이 있음으로 해서 그 어머니는 손가락을 아파하는 아기, 즉 타자의 아픔을 상상력에 의해 주체적인 자기의 아픔으로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상상력이며, 상상력이란 타자의 내적 경험을 자기의 내적 경험으로서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말한다.’
이 경우 타자란 ‘인간에 한하지 않으며 자기 이외의 존재는 모두 타자이다. 나뭇잎 하나, 돌 하나도 꽃 한 송이도 다 타자이다.’라고 앞의 시인은 말했다.
인간과 짐승들과 틀림은 상상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인간은 ‘죽음’을 생각할 수가 있다. 둘째, 인간은 욕구불만을 자기 마음 속에서 충족하려고 한다. 셋째, 인간은 되풀이해서 나타나는 것의 관계를 결부시키려고 한다. 넷째,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가 있다. 다섯째, 인간은 사물에 대해서의 표상을 抽出할 수가 있다. 여섯째, 인간은 眼前에 없는 상태를 생각해 낼 수가 있다. 일곱째, 인간은 현실에 없는 것을 생각해 낼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은 뛰어난 상상력의 소유자이며, 특히 시인은 이 강력한 상상력에 의해 시작을 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만인 시인이 스스로 체험하고 생활해 온 사물에 대해서만 감동을 끄집어내어 그것을 언어로 옮기는 일에만 시종하고 있다면 시인 같은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있어도 없어도 전혀 지장이 없는 하찮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시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인의 상상력이라고 하는 것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상상력이 시를 소위 실감 있고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 순수한 미적 차원으로 우리들의 정신을 끌어 올려 주게 된다.
찰방찰방 파도소리
듣고 있다가
조금만 아기 귀에
채워 뒀다가
산 너머 외갓집
토담 방안에
한 움큼만 내려놓으면
바다가 되고
한 움큼만 올려놓으면
물새가 되고 …
- 金香 作 ,아기귀와 아기눈>의 첫연
상상력이 풍부한 아름다운 이미지의 동시이다. 파도 소리를 조그만 아기 귀에 채운다는 그 상상력, 한 움큼만 내려놓으면 바다가 되고, 한 움큼만 올려놓으면 물새가 된다는 뛰어난 상상력에 독자는 크게 감동을 느끼게 된다.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추출되는 이미지가 陳腐하거나 평범한 것으로선 좋은 시가 될 수 없다.
시가 보다 감동적이고 실감적이고 보편적인 것이기 위해서는 작자의 상상력이 연마되어 예리하지 않으면 안 되며, 동시에 독자의 상상력도 풍부하고 예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에 있어서의 감동이란, 우리들이 자기의 발견이거나 투영이거나 어느 하나를 외부의 대상에서 발견했을 때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며, 그 감동을 지속시키고 응축시키고 발효시켜 언어로써 형상화했을 때 비로소 좋은 시가 성립된다.
李五德씨는 “창착과 비평”지에 실은 「시정신과 유희정신」에서 “동시는 어른인 시인 자신의 세계를 온 몸으로(물론 아동에게 주는 시란 것을 의식할 수도 있고,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쓴 것이 그대로 아동에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시, 곧 동시로 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했다.
즉 아무리 동시인이라 해도 시인으로서의 자각과 특질, 곧 높은 지성을 밑받침으로 한 시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시인으로서의 자세와 정열이 없다면 그의 작품은 독자에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할 것이며, 다만 어린이들의 의식 상태를 재미있는 말재주를 부려 흉내낸 것에 불과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감동을 지속시키고 응축시키고, 발효시켜 언어로서 형상화하지 않고 안이한 인식에서 쓴 말재주의 동시는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
케임브리지판 “어린이를 위한 시집”의 선시집 편자인 케네스 그레암도 선시집을 선택하는 데 있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린이에 대해서 노래한 시도 제쳐 버렸다. 이 마지막의 종류와 같은 回顧調는 어린이의 흥미라기보다는 어른의 흥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흥미란 바로 감동을 말한다. 이 점에 대해 이오덕씨 동시론에서 추억이라든가 회상이란 것이 어른들에게 절실한 마음의 운동이 될지 모르지만, 아이들에게는 유익을 가져오기 어렵고, 오히려 대개의 경우 정신의 자라남을 방해하게 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우리들이 시를 쓰려고 할 때엔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사금파리 하나 이름 모를 풀꽃 하나, 별 하나, 나래를 파득이는 새 한 마리, 크게는 세계, 우주 전체의 온갖 현상에까지도 지적 호기심을 갖고 응시를 지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위가 울고 있는 소리나 낙화가 자신을 부정하고 있는 몸짓에까지 호기심을 갖고 응시함으로써 비로소 시적 감동을 얻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체득해야 한다.
호기심이란 아이들을 날로 싱싱하게 자라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사과를 사과라고
누가 이름을 붙였을까
배를 배라고
누가 먼저 불렀을까
사과는 빨갛고
배는 노랗고
대추는 대추라고
누가 이름 붙였을까
밤을 밤이라고
누가 먼저 불렀을까
대추는 대추맛
밤은 밤맛
- 여효선 작 <누가 먼저 이름을>
이 동시가 말해 주듯이 무엇이든지 미지에 대한 소박한 驚異(감동)를 느끼며 호기심을 갖고 자란다.
이 경이를 발견하는 토양이 되는 것이 지적 호기심이다. 이 지적 호기심은 상상의 날개를 달고 자유롭게 비상하게 된다.
이 지적 호기심이란 자기의 내부로부터 외부로 뻗게 되는 觸手이다. 그리고 또 신앙, 예술적 창조, 발명 등에 의한 인간의 정신의 발전은 실로 이 호기심에서 비상하는 상상력의 발전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쓰고 있는 시나 동시에 있어서 우리들의 상상력이 빈약해서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좋은 시가 될 수 없다. 아이들의 흉내를 내는 말재주의 작품이란 용납되지 않는다.
시인에게 있어서 이미지네이션은 어디까지나 이 상상력이 아니어선 안 된다. 그래야만 우리들은 그 작품에 감동할 수 있고 픽션에서도 현실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의 追力으로 우리들을 자극할 것이며, 일종의 흥분이랄까 戰慄感을 느끼게 한다. 이것이 뛰어난 이미지가 갖는 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스톤 바슈라르라고 하는 프랑스 과학자는 상상력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도 사람들은 상상력이란 이미지를 형성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상상력이란 오히려 지각에 의해 제공된 이미지를 歪形하는 능력이며, 그것은 특히 기본적인 이미지로부터 우리들을 해방하고, 이미지를 변화시키게 하는 능력인 것이다. 이미지의 변화, 이미지의 뜻밖의 결함이 없으면 상상력은 없고 상상한다고 하는 행동은 없다. 만일 눈앞에 있는 어떤 이미지가 그곳에 없는 이미지를 생각하게 하지 않으면, 만일에 계기가 되는 어떤 이미지가 도망가는 수많은 이미지를 이미지의 폭발을 결정하지 않으면 상상력은 없다.”
즉 이 말은 시의 魅力은 비유나 형용의 정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언어의 배후에 펼쳐진 상상력의 깊은 여정, 그 비상거리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깊이 되씹어 보아야 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76~86쪽.
<잡초 속의 해인사 양귀비꽃>
제5시집
<序文>
꿀벌이 꿀을 치듯 시도 빚어야 하는 것을 나는 가짜 꿀을 만들어 내듯 시를 써 온 것이 아닌가 하고 부끄러워하면서도 시작을 단념하지 못하고 이제 또 시집을 내어놓게 되었다. 아무튼 이것도 내 나름대로의 인생을 살아가는 한 표현임을 자신하며 자만도 해 본다. 呵呵.
나에게 제일 싫어하는 세 가지가 있다면
종교인의 多辯, 서예가의 達筆, 시인의 美文이다. 누가 말하기를 당신은 이 세 가지에도 들지 못하는 주제꼴이라고.
이 시집의 간행에 있어서 평문을 주신 金奎東 詞伯 趙東珉 詞伯을 비롯하여, 물심으로 도와주신 인쇄계잡지사 安熙霖 회장, 그리고 책머리를 生光되게 해 주신 서예가 友竹 楊鎭尼 선생 東齋 鄭麟相 선생, 道谷 金兌庭, 後學 제위께 심심한 謝意를 표해 마지않는 바입니다. 1982. 9. 著者.
차례
<제1부> 오월12/ 흰콩 검정콩14/ 경로석16/ 눈싸움18/ 할머닌 미쳤나봐20/ 거북이 반대는22/ 노루아지3 24/ 반딧불26/ 새싹28
<제2부> 도레스의 진주30/ 버스를 타고32/ 패잔병33/ 봄이 오는 가정34/ 수향사2 36/ 인간이기 때문에37/ 석양39/ 교상구걸40/ 쓰르라미42/ 길44/ 낙동강46/ 동방의 태양48/ 인간을 보호합시다50/ 淸而濁52/ 橫死54/ 도홍이백56/ 밤의 꽃밭58/ 잡초 속의 해인사 양귀비꽃60/ 지금은 雨中63
<제3부> 시인의 요리 솜씨-김규동 66/ 예각과 향토색의 변증법 황우-이준범론 -조동만69
「오월」성욱아/ 이 할아버지하고도/ 같이 놀자// 싫어요/ 할아버진/ 할머니하고 놀아요// 수진아/ 이 할아버지하고도/ 같이 놀자// 싫어요/ 남경아, 할아버진/ 경로당에 가서 노는 거지?(월간문학) 12~13쪽
「흰콩 검정콩」할아버지 할아버지/ 왜 흰콩과 검정콩을/ 한 바가지에다 쏟아 넣으셔요?/ 오냐, 오냐 흰콩과 검정콩을/ 따로 따로 골라 내기 위해서야// 이것은 검정콩/ 검정콩은 이 바가지에/ 이것은 흰콩/ 흰콩은 이 바가지에/ 이것은 흰콩/ 이것은 검정콩/이것도 검정콩, 이것은 흰콩// 할아버지 틀렸어/ 검정콩 바가지에 흰콩을 넣었어요/ 이번에도 틀렸어요// 그래 내가 실수했군/ 진우야 진우야 이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작은 실수는 말할 수 없이 많이 했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큰 실수도 했단다.(印刷界誌) 14~15쪽
「경로석」할아버지 할아버지/ 저기 앉아 있는 학생이 불쌍해요/ 저 학생 집엔 할아버지가 없나 봐요/ 옆에 할아버지가 서 있는데도/ 자리를 안 비켜 주고/ 창 밖만 내다보고 있지 않겠어요/ 그리고 할아버지/ 저 학생은 공부는 잘 못하나 봐요/ 머리 위에 ‘경로석’아런 딱지가 붙어 있는데도/ 경로석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니까/ 저렇게 앉아 있지 않겠어요.(新文藝同友會誌) 16~17쪽
「눈싸움」할아버지 눈쌈해요/ 진 사람이 말이야/ 이긴 사람 태우고/ 방 한 바퀴 돌기 해요/ 하나 둘 셋!/ 다시 해요 다시 해요/ 하나 둘 셋!/ 다시 해요 다시 해요/ 하나 둘 셋!/ 이겼다 이겼다/ 할아버지 약오르지/ 이렇게 이렇게 엎드려요/ 점잖게 출발해요/ 딸랑딸랑 길 비켜라/ 백설공주 만나러/ 왕자님 나가신다.(소년한국일보) 18~19쪽
「할머닌 미쳤나봐」이쿠 성욱이 깼구나/ 많이 많이 잤어/ 성욱인 성욱인/ 참 착한 사람이지/ 낮잠을 자고나서도 울지 않거든// 할아버지/ 할머닌 어디 갔어?// 시장 갔다 장보러/ 성욱이 좋아하는/ 초코렛 사온댔어// 할머닌 미쳤나봐/ 날 안 데리고 가고.(글벗 誌) 20~21쪽
「거북이 반대는」성욱아 성욱아/ 할아버지 반대는 뭐지?/ 할아버지 반대는/ 할아버지 미워하는 할머니// 그럼 성욱아/ 성욱이 반대는 뭐지?/ 응, 성욱이 반대는/ 나한테 오빠라고 안하는 수진이// 그럼 거북이 반대는?/ 할아버진 그것도 몰라?/ 난 알아/ 거북이 반대는 토끼야.(유년동시56인집) 22~23쪽
「노루아지3」어메야 어젯밤엔/ 달빛에 보는 은은한 목련꽃에/ 어메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울고 있었어요// 어메야 난 어메를/ 영영 보지 못하게 되는 걸가?// 난 인간들이 미워 싫어요/ 어린이를 유괴해서 돌려 주지 않고/ 자식이 어미를 물에 떠밀어 넣고/ 서로 총질을 하고 전쟁을 하고/ 인류의 멸망을 가져 오게 하는/ 인간들이 죽도록 싫어요// 이 영마루를 넘어가면 어딜까/ 파도가 치는 망망한 바다로 가야지/ 파도를 안고 목놓아 울고 싶어/ 이 세상 다할 때까지 울고 싶어(인쇄계지) 24~25쪽
「반딧불」나는 나는 개똥밭이 좋아요/ 개똥밭에서 천대를 받으며/ 마구 자랐기 때문에/ 나는 나는 개똥밭이 좋아요// 나는 나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이 좋아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이/ 분수대로 노력껏 살아 가는 것이/얼마나 진실해요// 나는 나는 밤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 집을 찾아가서/ 아름다운 꿈을 꾸시라고 기도해 드리죠// 나는 나는 그 꿈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보석이 되어 드리죠.(인쇄계지) 26~27쪽
「새싹」양지 바른 돌담 밑에/ 뽀족이/ 뽀족이/ 새싹 돋았다// 고 약한 새싹들이/ 어떻게 흙을 뚫고 돋았을까?/ 햇살이 자꾸만/ 그리로 쏠린다(유년동시 56인집) 28쪽
「버스를 타고」할아버지/ 매일 매일/ 어딜 가셔요?/ 버스 타러 간단다// 버스를 타고/ 어딜 가셔요?/ 아무데도 안 간단다./ 왔다 갔다 한단다.(시문학) 32쪽
「패잔병」뇌성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엄마, 아이 무서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엄마 어떻게 집엘 가지?>// 그 빗속을 패잔병이/ 발을 쩔뚝거리며 걸어 나온다/ <엄마 아빠다 아빠->(월간문학) 33쪽
「봄이 오는 가정」아침 햇살이 퍼진/ 성기네 집 뜰에/ 둥우리의 병아리를 내려 놓는다// 영아네 집 뜰에도/ 병아리를 내려 놓는다// 용진이네 집 뜰에서는/ 할아버지 앞에서/ 손잣놈이 삐요삐요 쫑쫑쫑// 길을 잃은 노루아지가/ 앞 산 위에서/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다.(인쇄계지) 34~35쪽
「水鄕寺2」탕탕탕 목탁을 치며/ 독경을 하고 있는데// 사람은 있는데/ 스님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을 두고/ 스님은 어딜 가셨을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신문예동우회지) 36
「인간이기 때문에」안색이 파릿한 修女가/ 파계를 했다 해서/ 크게 놀랄 것도 아니지 않아요/ 육덕 좋은 귀부인이/ 외간 남자를 보는 거나/ 다를 바가 뭐 있겠어요// 개기름이 번질한 스님이/ 축첩을 했다 해서/ 핏대를 올려 욕할 것도 없지 않겠어요/ 물개 수놈은 몇 백 마리 암놈도/ 거느리고 다닌다지 않겠어요// 그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너무나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딸이 되기도 했을 것이고/ 부처님의 제자도 되었을 것이 아니겠어요/ 요조 선덕여왕 같은 분도 뒷간에 앉아선/ 끙끙 앓는 소릴 했다지 않겠어요/ 여왕도 인간이기 때문에.(인쇄계지) 37~38쪽
「석양」 영감/ 이번엔 어느 벤치로 옮아 가지?/ 글쎄, 빈 벤치가 나야지/ 그냥 더 앉아 있습시다/ 그래요, 이 공원 안 벤치엔/ 다 한 번씩 앉아 봤으니/ 오늘은 여기서 끝내기로 해요/ 아직 해가/ 한 발이나 남았구나.(신문예동우회지) 39
「橋上求乞」한 푼 동정하십시오/ 이 어린 새끼가 불쌍해요// 마음이 착한 사람은/ 복을 많이 받게 될 것이요/ 불쌍한 사람을 동정하지 않는 사람은/ 복을 받지 못할 것이요/ 불행이 찾아갈 것이오// 수양버들이/ 흔들리고 싶어서 흔들리나요/ 누구는 구걸하고 싶어서 하는 건가요/ 이 새끼가 불쌍해서 하는 거지요// 한푼 동정하십시오/ 이 어린 새끼가 불쌍해요/ 이 불쌍한 것이 자라서/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될지/ 누가 알아요.(인쇄계지) 40~41쪽
「쓰르라미」쓰르람 쓰르람/ 이 나라엔 바보가 없다/ 다만 황우란 바보가 있을 따름// 더위도 추위도 분간 못하고/ 년중 검정두루마기를 입고 다니며/ 쓰르람 쓰르람// 천성이 술을 좋아하여/ 인도에 오줌을 갈기다가/ 제풀에 쓰러지며 쓰르람 쓰르람//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니다/ 쓰르람 쓰르람.(총력안보지) 42~43쪽
「길」늙은 黃牛가/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 사바의 쓴 타액을 반추하며// 어디서 오는 길인가/ 어디로 가는 길인가// 결국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멀리서 가까이서/ 포성이 울려오고// 길섶 이름 없는 풀꽃은/ 철없이 피고 지고// 길은 외길/ 가도 가도/ 죽어서도 다 못 가는 길.(시문학) 44~45쪽
「낙동강」烏鵠 7백리를/ 수없는 가슴들이 허물어져 간/ 억년 세월이 여기 흐르고 있다// 골골이/ 뻐꾹새 유난스리/ 춘궁을 울어 주었고// 6.25의 피소답을 빤/ 아낙네들의 사연을 노질한/ 赤布 뱃사공// 어느 물굽이에/ 영산홍 요요히/ 강촌 아침 인사에/ 토장내가 나는/ 빈한한 풍속이/ 연기에 그을린 등피// 오늘도 나는 강 언덕에 서서/ 신라의 후예들이/ 쌓올리고 쌓올린 가슴벽들이/ 유수에 허물어져 가는 소릴 듣는다.(신문학60년대표전작) 46~47쪽
「동방의 태양」대지가 뿌리를 받아 들여/ 꽃을 피우게 하고/ 열매를 익게 하는 것은/ 대지의 풍요한 미덕 때문만이 아닙니다/ 태양이 빛과 열로/ 대지를 돌봐 주지 않는/ 들꽃이나 열매를/ 어떻게 우리들이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삶에 비굴하지 않고/ 꽃을 좋아하고 열매를 마무리할 줄 아는 것은/ 당신이 나를 돌봐 주기 때문// 당신은 나의 사계를 다스리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 동방의 태양.(현대시학) 48~49쪽
「인간을 보호합시다」이른 봄에/ 전 서울고등학교 앞/ 버스 정류소 바로 옆 담장을 따라/ 잔디를 깔고 관상목을 심곤/ <나무를 보호합시다>라는/ 푯말이 꽂혀 있었다// 오늘 낮에 그 앞을 지나다 보니/ 그 푯말의<나무> 위에다/ <인간>이라고 쓴 종이딱지가 붙어 있고/ 그 옆에 求乞하는 노파가 펑퍼져 앉아서/ 한 손을 무릎 위에 내밀고/ 이마에 땀을 흘리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印刷界誌) 50~51쪽
「淸而濁」맑은 물에 노는 작은 물고기는/ 맑은 물만 물인 줄 알고/ 탁한 물에 노는 큰 물고기는/ 탁한 물만 물인 줄 안다// 지사는 청류를 보면/ 몸을 씻어 지조를 고결하는 데/ 태만함이 없는가 반성하고/ 大器는 탁류를 보면/ 치산치수를 하여/ 국토를 기름지게 할 것을 걱정한다// 大愚는 청탁을 倂呑하고도 여유가 있고/ 그것을 다 토해 내고도/ 스스로 충만할 따름이다.(인쇄계지) 52~53쪽
「橫死」새들이 내 머리 위를/ 수 없이 날아 지나갔다/ 때로는 하늘 높이 때로는 나지막이/ 그런데 한 번도 나는/ 그 새들이 배설하는 똥 오줌을/ 머리 위에 덮어 써 본 적이 없다/ 어디서 어떻게 죽어 가는지/ 그 모습을 본 적도 없다/ 나의 소년은 신기했다/ 오늘 나는 우연히 땅바닥에 떨어져/ 날갯죽지를 뻗고 죽어 가는/ 흰 새 한 마리를 목격했다/ 가슴에 총알이 뚫고 나간 구멍 언저리의/ 솜털에/ 피투성이가 더덕더덕 말라 붙어 있었다(인쇄계지) 54~55쪽
「밤의 꽃밭」안색이 초췌한 진아는/ 학교 뒷산 꼭대기/ 높은 바위 틈에 기대 앉아/ 아버지가 택시를 몰고 누비는/ 변화한 시가를/ 멍하니 내려다 보고 있다// 진아는 식욕을 잃어/ 점심 도시락도 먹지 않았다// 아침 만원 버스 안에서/ 학교 등록금을 소매치기 당하곤/ 그 돈의 행방을/ 종일 생각하고 있었다// 해가 저물며 여기 저기에/ 등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이윽고 시가는 온통/ 별하늘도 무색한/ 난만한 꽃밭이 된다.(인쇄계지) 58~59쪽.
「잡초 속의 해인사 양귀비꽃」 고즈너기 무르익는/ 십분 고혹적인 당신의 여자 얼굴 속에서/ 나는 순진하고 다정한/ 청초한 소녀의 얼굴을 엿보았다// 당신은 알고 있는지/ 당신의 소녀의 꿈은/ 당신의 심장 속에 감추고 있나요?// 어지러운 당신의 그 표정에/ 문득 문득 던져 주는 그 소녀의 미소는/ 간간이 바람에 쏠리는/ 잡초 속의 해인사 양귀비꽃이었다// 당신의 마음은 지금 어디를 헤매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부질 없는 억측으로 스스로 슬퍼하고 있나니// 물끄러미 바라보는 당신의 그 윤기 띤 시선이/ 독사의 혀끝처럼 날카롭게/ 내 가슴을 사정 없이 꿰뚫는 것을/ 당신은 은밀히 알고서도 말이 없는 걸까?/ 싱싱하게 숨 쉬는 당신이란 그 여자의 色身에/ 그 우아하고 결백한 얼굴에 슬픈 사연의 感傷인 듯/ 불안의 전율인 듯 상기하는/ 함초롬히 붉은 포도주를 먹음은 듯/ 당신의 그 현기로운 입술 앞에/ 나는 바보야 줄이 끊긴 연이었다.(신문예동우회지) 60~62쪽
「지금은 雨中」비가 내리고 있다/ 천천히/ 억수히// 내용을 다 도둑맞은/ 고분이/ 비를 맞으며/ 그 외엔/ 아무 것도 불 것이 없다.(月刊詩) 63쪽
◇ 시인의 요리 솜씨-김규동 / 할아버지/ 매일매일 어디 가셔요?/ 버스 타러 간단다// 버스 타고/ 어딜 가셔요?/ 아무데도 안 간단다/ 왔다 갔다 한단다. 이럭저럭 세월을 보내고 나서 우리는 늙은 다음 손자와 이야기나 나누는 따뜻한 일과가 그래도 남을른지 모른다. 버스 타고 왔다 갔다하는 아무 소득도 올리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 시인을 그래도 손자와 손녀들을 기다려 줄 것이라 생각하면 공연히 코끝이 시큰해진다. 앞의 건은 이준범의 “버스를 타고”의 전문이다. 한 마디로 어른을 위한 동요요 동시다. 생활의 체험과 그것을 승화한 지점에서 하고많은 말 가운데의 가장 순수하고 알뜰한 부분을 진주같이 주워 모아서 엮은 아기자기한 이야기다. 무엇이 일어날 것 같은 시행들 사이에서 조마조마하게 떠오르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무력하면서도 착한 인간의 이야기를- 인간의 애정을 여기서 다시금 맛보게 된다고나 할까. 시를 쓰기 위해서 썼다기보다 자연히 떠오르는 말이 있어 시로서 옮겨 놓은 경우의 한 좋은 본보기다. 형식상으로도 압축이 되어 있어 긴장감이 충분하며 대화가 그대로 시의 구절이 되고 있다는 사실도 매우 신선한 느낌을 준다.(시문학) 66~68쪽
◇ 예각과 향토색의 변증법 황우-이준범론 -趙東珉(1976년 동아일보 문학평론, 1977년 현대문학 문학평론 추천완료) 1. 황우의 印象 ; 오늘날 시의 분석이 그 단어의 의미 하나 하나는 말할 것도 없고, 어감 하나 부호 하나에까지도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하나의 불문율이다. 이 말은 역으로 시의 분석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황우 이준범 시인을 대할 때마다 그 처신상 속에서 그의 시를 읽어 버리고 만다. 은백색의 고운 백발과 검은 두루마기에 구릿빛 피부, 호탕한 웃음과 거침 없는 익살과 악담(?) 그러한 것들이 바로 그의 시라는 느낌을 갖게 되고 만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인상 속에서 벌써 지성과 야성, 소탈함과 강직함을 동시에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실로 황우의 작품을 읽었을 때에도 이와 똑같은 느낌을 받기 일쑤였다.
더구나 그의 아호가 주는 인상은 한층 더하다. 흙과 더불어 살면서 순종과 인내를 길러 왔고 소박하면서도 잔꾀를 부릴 줄 모르는 황소, 그러면서도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무서운 뚝심과 반항아의 기질, 그런 야누스의 동물이 이준범 시인의 아호다. 이러한 기질의 동물을 아호로 삼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부지런하고 온순하고 불평하지 않고 타락하지 않고 비관하지 않고 아부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고, 이유 없이 반항하지 않고, 주인을 배신하지 않는 소라 하지만, 그 소에게서 나는 몇 가지 미덕을 배워 자신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 황우의 자화상 일부.
이러한 자신에 대한 반문은 황우를 아호로 삼은 충분한 해명이 된다. 소가 지닌 미덕 그것을 삶의 지표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추구가 그의 삶과 예술 속에 얼마나 깊이 용해되었으며, 일치를 이루고 있는가는 앞으로 밝혀내야 할 주제이지만, 그 작품에 앞서 그의 생활과 인상 속에 이미 이와 같은 상이 잡혀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작품을 읽어봄으로써 우리는 황우의 시세계를 탐구해 가는 길잡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황우는
아슬히 실망했다
크낙한 울음과 함묵을 생각타가
난맥한 혈통
분뇨의 시궁창
그렇게도 아름답던 장미꽃도
표정도 색채도
저음도 없는 허전한 고요
광막한 들녘에서
황우는
넌지시 반추하며 기동한다
하늘과 천지와 어둠을
아름히 호흡하며
시침은 언제나 종점에서
출발이 마련되는 것
황우는
여지로 자세한다
길은 없어도 갈 길은 있어
다시 여명으로 치뻗는 예각은
義로써
네 발의 행동을 앞선다.
- 황우 전문
선배의 추천도 없이 무모하게 시집 한 권을 들고 문단에 나선 그로서 마땅히 있음직한 선언서다. “황우” 한 권을 가지고 문단에 나선 그 행위는 자신으로 볼 때에는 일대 웅비하기 위해 일대 전기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아무도 이끌어 주는 이 없는 단신으로서는 고군분투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리라 믿는다. 그러기에 그는 “길은 없어도 갈 길은 있어”하고 황우적 기질을 노래하였고, 비굴하지 않게 자신을 이끌기 위해 예각(義)으로써 행동의 지표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기상이 바로 황소의 기상이며 그의 시정신을 간명하게 표현해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가 행동의 지표로서 의를 표방하고 나섰다고 하는 것은 그의 삶과 예술의 방향을 천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게 한다.
2. 예각의 의미
“다시 여명으로 치뻗는 예각은/ 의로써/ 네발의 행동을 앞섰다.”
이처럼 “황우”의 末句인 예각의 이미지는 매우 강렬한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불의에 항거하는 예각으로서 정의를 표방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의 양심과 성실성을 엿볼 수 있으며, 현실에 대한 역사 의식과도 무관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의로움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이 사회를 되돌려지는 시인의 진실된 양심 이외에 딴 것일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때로는 연민, 때로는 울분, 때로는 저항, 때로는 순교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다음과 같은 서문에서도 이러한 일단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반역이야 어찌 어미의 소망이랴? 허나 주위의 수욕 됨이 그리 심함에 너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좌충우돌하는 울분을 어민들 어찌하랴?”-“황우”의 서문
여기서 말하는 <울분><반역> 등의 표현은 바로 義를 표방하는 銳角의 특성을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예각의 성질은 그 작품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데, 그것을 바로 삶의 치열성 또는 그 비극성에 대한 휴머니즘이며 사회정의로 말해질 수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그 첫 시집에서만 보아도 삶의 치열성과 비극성을 보여주고 있는 <溺體><지렁이><파리><황우의 일과><구걸><금이 간 황우> 등을 볼 수 있고, 따뜻한 인간애를 그려주는 <내가 곤란할 때 남을 도웁시다>가 있으며, 4.19의거를 소재로 잡은 <6월 가로수에 기대서서><어둠을 밀고 가는 행진>이 있고, 현실적 불안을 상징하는 <태풍 케-리호>가 있다.
이러한 경향은 제2시집 “탱자나무꽃”에서나 제3시집 “주춧돌”에서도 여전히 나타나 있으며, 최근에 발행된 제4시집 “노루아지”에서도 <풍경일 수 없는 분수>나 <이리의 눈> 같은 작품을 통해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다만 후기 작품 세계로 올수록 그 빈도가 줄고, 보다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그 표현이 부드러워졌을 뿐이다.
어떻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애정으로 귀납될 수 있는 이러한 계열의 시는 황우의 기질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것들이며 예각으로 象徵될 수 있는 것들이다.
황우는
답답한 하늘을 들이받았다
아무런 反響도 없이
구름이 예각에 와 감긴다.
<중략>
황우는
대지를 걷어찼다
황우는 자신 안으로 굴러 떨어지며
대지에 금이 갔다
황우는
금이 간 언저리를
피맺힌 혀로 쓰윽쓰윽 핥는다.
- <금이 간 황우> 전문
반역이 그 시의 본령이 아니라 할지라도 受辱의 한계를 넘을 때 황우는 저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작품도 비록 허무적이긴 하나 답답한 현실에 대한 저항을 표상한 것이다. 인간 최고의 지성이 시인이란 점을 감안할 때, 시인의 저항은 단순한 저항일 수 없다는 점이다. 그거야말로 가장 고귀한 양심 선언이란 점에서 그 고귀함이 존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의 저항은 올바른 양심적인 비판의식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비판의식은 바로 귀중한 역사의식 그것이다.
큰 싸움을 치르고 남은
폐허의 주춧돌을 안고
다시 놓을 자리를 찾아
나는 오늘까지 왔다.
- <주춧돌> 전문
결국 반역이나 저항 같은 것의 근원은 바로 이와 같은 역사의식 위에 자라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전통적인 선비의식과 통하는 깨끗한 양심이다. 황우의 예술 속에 의분과 연민을 지닌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의식의 영향이며, 그의 예술이 깨끗하고 타락하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러한 시정신의 덕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신적 지주는 신념의 소산이다. 그의 작품 세계를 보면 그는 확고한 신념의 시인이란 점을 알 수 있다. 기실 신념을 노래할 수 있는 시인만이 참다운 시인이다. 시인이 민족의 역사와 인간의 현실 속에서 확고한 신념을 갖지 못한다고 할 때, 그는 시를 자신의 신앙으로 삼을 수 없는 사람이다. 이럴 때 그는 언어의 기교에 집착하게 된다. 따라서 시인이 내용 없는 감각, 비전 없는 영탄에 빠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소치에서 연유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예술은 한 세대의 거친 홍수가 지나면 바로 망각의 늪 속에 잠겨 버리고 만다. 그것이 신념이 없는 예술의 운명이다. 이와 반대로 세계에 대한 참다운 애정으로 노래할 때, 그 시는 기교를 초월해서 영원히 인류의 가슴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교에 앞서 작가 정신을 강조하는 것이 여기에 이유가 있다. 혼과 혼이 맞부딪칠 때만이 인간의 밝은 지혜가 눈뜰 수 있기 때문이다.
구슬이라 해서 다 玉일 수 없고
분수라 해서 다 풍경일 수 없다
일찍이 가난하고 약한 젊은이들을
분노케 하여
선혈(鮮血)로 물들게 한 이 광장의 분수
너는 오늘도 풍경일 수 없다
가난하고 약했던 그 젊은이들의 소망이
우리들의 가슴속에서
꽃피지 않는다면
너는 종일을 치솟아도 풍경일 수 없다.
- <풍경일 수 없는 噴水> 일부분
이 작품에서는 두드러진 기교나 구조상의 특징도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선명한 이미지나 참신한 감각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다고 달콤한 서정도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詩 속에서 거부할 수 없는 감동이 파동쳐옴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그 감동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은 분수가 아니라 분수를 바라보는 시인의 역사의식에서 비롯한다. 그의 투철한 안목을 통해서 무의미한 풍경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될 때, 우리들의 의식은 새롭게 눈뜨게 된다. 그 눈뜨는 환희 그것이 바로 이 시의 감동이다. 이렇게 우리의 혼을 깨워줄 때 시인은 그 사명을 다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실로 이 작품을 볼 때 올바른 역사 의식이 한 편의 작품을 형상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고귀하게 작용되는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황우”에서 “금이 간 황우”“주춧돌”“풍경일 수 없는 분수”로 이어지는 세계는 예각의 의미를 가장 확실하게 부각시켜 주는 계열의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들은 일면 참여시의 성격을 지니면서도 구호적인 폐단을 극복하고 예술로 승화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황우의 예각이란 바로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올바른 역사의식, 곧 윤리관을 상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3. 향토성의 의미
예각으로 상징되는 시인의 역사의식이자 그 고귀한 양심을 시의 골격으로 삼는다면 문명의 때가 끼이지 않은 순수한 향토적 체취를 무엇이라 할 것인가? 그것은 바로 시의 육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정신과 육체가 자라온 고장의 모습인데, 이거야말로 시인의 체질 바로 그것이다. 예각으로 상징되었던 역사의식이나 사회 정의가 다분히 윤리적이고 의도적이라면, 향토적 세계는 체질적이고 본능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무 가지에
봄이 총총 망울지면
암탉은 둥우리에 들어 알을 품는다.
- <봄>의 一聯
東籬의 黃菊 옆에
암탉 벼슬이 곱게 붉었고
정지 앞 우물가엔
새댁이 술쌀을 담근다.
- <가을>의 二聯
이러한 향토에 대한 스케치는 바로 시인의 기억 속에 언제나 자리잡고 있는 마음의 풍경이다. 국적 있는 정서라 할 수 있는 이 한국적인 정경은 전통적인 소박과 순수 그리고 애수를 주축으로 하고 있으면서 그 특유의 건강미를 보여준다.
화사한 빛깔이나 모양을 탐내지 않음은
이웃을 넘어다보는 욕심이 없기 때문
우러러 별빛에 고운 볼을 부벼 봄은
높은 님 모시올 조심성에서 옵니다.
- <탱자나무꽃> 2,3연
이러한 작품에서는 전통적인 겸허와 순박 그리고 열녀성까지도 엿볼 수 있다. 이만큼 황우는 전통적인 것 또 한국적인 것에 깊이 심취되어 있는데, 이는 의도적이라기보다는 본질적 체취로 여겨진다. 고향을 생각하고 어린 시절을 회상함으로써 마음에 이는 희열 그것이 바로 향토를 찾는 동기일 것이다. 많은 꽃노래를 통해서 향토를 찾고 있는 그 바닥엔 바로 이러한 정신적 뿌리를 찾는 심리적 욕구가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작품에서 우리는 이 시인 특유의 소박한 체취를 맛볼 수 있다.
봄은 시골처녀들에게
노랑 저고리를 입히기를 좋아한다
노랑 저고리를 입는 처녀들은
생활력이 강하다.
<중략>
엉덩이가 바라진 처녀들은
시집가서 생산을 잘 한다
생산을 잘할 처녀들은
봄이 오면 남 먼저 노랑 저고리를 입었다.
- <민들레꽃>
마치 고갱의 화법을 연상케 한 이 작품은, 민들레꽃이 모티브가 되어 표현된 시골 처녀의 소박함과 건강함이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다. 고갱이 굵고 소박한 선과 색상으로 건강한 남태평양의 여인들을 그려냈듯이 황우는 “민들레꽃”을 통해서 투박한 문장으로 한국 농촌의 건강한 여인상을 선명하게 그려주고 있다. 이러한 작품에서 우리는 남달리 건강한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고 생의 남성다운 야성미와 원시적 건강미를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황우의 작품 세계에서 우리가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특질의 하나는 원시적 건강미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속에는 강한 생명력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 “민들레꽃”에서도 그런 점을 강하게 느낄 수 있지만, 다음과 같은 작품은 왕성한 생명력이 한 편의 작품 속에서 얼마나 정서의 차원을 효과적으로 높여주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까투리 쫓는 쟁기 울음
골을 쨍 울린 한낮
기달피는 눈을
하늘 멀리 발돋움하고
입술에 젖는 붉은 상념이
가지마다 뚝뚝 맺혀
석류꽃 폈다.
장 익는 장독대에
석류꽃 폈다
- <석류꽃>
아름다운 榴夏의 농촌 정경이 그림처럼 담겨 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 위에 넘쳐흐르고 있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거니와 이러한 생명력이 ‘장 익는 장독대’같은 향토적 정경 속으로 융해되면서 한 폭의 정든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또 그러한 생명력이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야성적인 것임에 더욱 순수하고 건강함을 느끼게 해 준다. 황우는 이 작품을 통해서 건강한 생명력이 우리의 향토성과 얼마나 아름답게 조화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건강미를 말하게 될 때, 또 한 가지 필연적으로 떠오른 것은 性感이라 할 수 있다. - 여기서 성감이란 자극을 통한 심리적 諸反應을 총괄하는 뜻으로 쓴 말이다.- 황우는 시에 있어서 서정미의 하나로서 상당한 성감을 원용하고 있는데, 그 수법면에 있어서 과거와는 상당히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 곧 영탄이나 말초신경만을 자극하는 병폐를 철저히 탈피하면서 신선한 감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런 신선감은 주로 외면 묘사적인 이미지와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몇 개의 실례를 들어보면,
젖가슴으로 사르르
치들어 받는
純紅의 <키스>
- <薔薇>
淋漓한 입술에
은밀한 속삭임 있어
몸부림 있어
- <기쓰 미 키쓰 미>
의상이 미끄러지는 허리춤에서
태양도 현기하면
외면한다
- <달리아>
뽀죽한 손톱으로
젖꼭지를 꼭꼭 찔러
ㅡ <찔레꽃>
이러한 것들인데 결코 그것이 저속한 영탄이나 말초신경의 자극에 연루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수법은 시인으로서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을 극복했다는데 일차적인 성공으로 기억될 수 있다. 어떻든 다른 사람에 비해서 빈도 잦게 원용되고 있는 이 성감의 미학은 우리에게 강한 생명감 내지 역동성을 보여줌으로써 삶을 긍정적으로 이해시켜 주는데, ‘8월의 당신이/ 황홀한 비명을 지르는 순간/ 나는 죽음의 관념을 포착해 버리겠다.’고 “팔월은” 시의 표현 속에서는 性戱나 肉悅이 아닌 엄숙미까지를 느끼게 된다.
본질적으로 생명체의 근원에는 성적 충동이 자리해 있고 생명의 본질을 표현하자면 필연적으로 성적 충동과 맞부딪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성적 충동이나 매력을, 감정의 물러빠짐 없이 단단한 것으로 승화시키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또 절실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생명력 넘치는 건강미와 함께 또 하나 말해야 할 것은 애상성이다. 월명사의 <祭亡妹歌>나 <가시리>이래 <진달래꽃>으로 이어지는 애수는 좋은 궂든 간에 우리민족의 서정적 주류를 이루어 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만큼 우리의 토착적인 것을 들추다보면 자연히 이것과 만날 수밖에 없게 되는데, 황우의 작품세계에서도 그러한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낙엽><들국화><코스모스><소라껍질을 닮아 가는 소녀> 따위에서 이러한 애수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다.
목이 긴 소녀는
이별이 있어야 합니다
향기가 슬픈 빛깔을 해야 합니다.
화려한 봄보다
풍성한 여름보다
조촐한 가을을 좋아해야 합니다.
목이 긴 소녀의 이별은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산모롱이에서 해야합니다.
- <들국화> 일부분
이 시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직관이다. 이 직관은 전통적인 서정을 유지하면서도 그 서정이 영탄에서 벗어나는데 크게 공헌하고 있다. 그로써 <들국화>의 표현법은 <가시리>나 <진달래꽃>의 표현법과 크게 다른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서정이 아니라, 자신의 직관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들국화>에 부합되는 새로운 상을 창조해 냈다는 점이다.
요컨대 지금까지 고찰해온 바를 종합해볼 때 황우는 <탱자나무꽃>이후 줄곧 소박하고 건강한 향토성과 애수를 주제로 하는 작품을 많이 써 왔는데, 이는 그의 정신적 고향에의 추구였으며 그 자신의 체질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예각으로 상징되는 정의의 세계가 골격이라면 이 향토의 세계는 육질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점은 그의 시법에 관한 문제다. 그의 시는 대체로 언어의 해체가 없는 전통적인 外觀法을 써 옴으로써 리얼리즘의 세계에서 한 발자국도 이탈함이 없었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현대 수법에서 매우 낙후된 듯한 느낌이 있으나 그것은 오히려 자신을 지키려는 신중성으로 이해된다. 곧 경박한 외래풍조에 탐닉하지 않음으로써 시상의 모호함이나 치졸한 객기로부터 자신의 예술을 보호했던 것이다. 서구 사조에 신중하고 反서구화를 고수한 한편, 건실한 직관과 신선미 있는 성감을 적절히 가미 조화시킴으로써 상징성의 열세를 안고 있으면서도 단단하고 밀도 있는 심상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반서구화의 기치를 고수하면서도 현대시를 성공으로 이끌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시인이다.
4. 노루아지의 세계
꿋꿋한 의지를 안으로 감추고 있는 예각의 세계와 정신적 안주를 찾는 향토의 세계는 과연 영원한 평행선일 수가 있을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황우의 시 세계는 더 이상의 반전을 기약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황우의 야누적 면모는 스스로 자체의 변증법을 요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말하자면 분리가 아닌 대종합으로의 발전을 스스로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 <주춧돌>까지의 양면성을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될 숙명을 스스로 안고 있는 것이다. 그 길만이 황우의 시가 다음 단계로 비약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어메야 어메야
나 혼자 우야라카노
풀국 풀국 풀국새야
너 와 청승맞게 울고 있지
사람 냄새가 싫어
화약 냄새가 죽어도 싫어
방울새야 방울새야
나하고 놀자
어레 산다화꽃 좀 보래
산다화야 산다화야
- <노루아지> 전문
이 “노루아지”의 세계는 그의 가장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예각의 세계와 향토의 세계가 융화되어 통일을 이룬 경지라 볼 수 있다. 여기서는 경상도 특유의 土俗音을 효과적으로 살려가면서 생명에의 외경과 평화에의 열망을 간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황우가 이러한 “노루아지”를 통해서 동화적인 세계를 창조해 내고 있다. 그 세계는 아동문학을 겸해서 하고 있는 그로서는 마땅히 도달해야할 정신적 고향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의 밑바닥에는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사랑이 짙게 까려 있다. “아기의 평화”“성욱이 미워”“뿐도”“옛날 옛날에” 등의 작품 세계는 그의 가장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인간이 마지막 도달하고픈 평화에의 강렬한 동경을 나타낸 작품이다. 실로 황우의 시는 “노루아지”에 이르러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고 있음을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향토적 순수와 예각적인 시인의 양심은, 지금보다 근원적인 인류의 평화와 박애의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신부님
제발 그 종소릴
삼가해 주셔요
방금 우리 아기가
잠이 들었어요
아기의 평화가
그 종소리로
깨뜨러진다면
그 땐 신부님
어떻게 하시겠어요.
- <아기의 평화> 전문
이것은 신에 맞서는 인간의 대결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 하나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평화를 옹호하고 있는 가를 여실히 엿볼 수 있는데, 역시 그는 종교적 구원보다도 인간적인 평화를 높이 사는 휴머니스트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렇게 열렬하게 추구한 평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가져야할 최후의 이상 이외에 딴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평화가 없는 곳에 인간의 행복이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예각의 윤리의식이나 향토적 순수 세계가 귀납될 수 있는 대단원이다. 이렇게 볼 때 황우의 평화 추구는 그의 문학에 있어서 종합 통일의 광장인 셈이다.
성욱이 미워
왜 미워 할아버지?
성욱인 잠꾸러기잖아, 그래서 미워
그럼 난 할아버지가 미워
왜 미워?
할아버진 술 많이 마시고
오줌 쌌잖아 아이 창피해
에 요놈
그런 소릴 하니까 할아버진 성욱이가 미워
- <성욱이 미워> 1연
이러한 세계는 인간이 가장 도달하고픈 행복의 일면이다. 곧 평화 추구와 행복간의 함수관계를 명료히 추출해볼 수 있다. 이 밖에도 “할아버지 안 할거야” “뿐도” 등의 <노루아지> 세계는 현실과 평화에의 염원이 융화되어 행복이라는 주제를 극명하게 해준 원숙한 경지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작품은 생활의 시이자 그대로 동화의 세계다. 곧,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을 받는 세계가 바로 이 세계이기 때문이다. 황우가 이러한 세계에 도달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예술과 인생이 이미 달관의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無慾無我의 경지에 도달한 경지라 할 수 있다. 참으로 훌륭한 시는 결코 격정이나 정열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익히 아는 일이다. 오히려 좋은 시일수록 격정이 가라앉은 후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노루아지>의 세계는 격정의 세계가 아니고 무아의 경지다. 모든 것을 버리고 초월할 수 있기 때문에 훌륭한 시를 얻게 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제 황우는 초기의 예각의 윤리성과 향토적 순수를 박애와 평화라는 대단원 속에 귀납시키고 기량과 정신면에서도 원숙 속에 새로운 철학을 창조해야할 단계에 서 있는 것이다.
5. 攝理의 意味
그러면 그가 추구해 가는 세계는 어떤 것일까? 제5시집<잡초 속의 해인사 양귀비꽃>을 중심으로 이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 마디로 이 시집의 작품 세계도 <노루아지>의 세계와 별 차이는 없다. 독, 자연인으로서의 행복과 평화에의 추구가 그대로 지속되어 잇다. 다만 <노루아지>의 세계와 다른 점이 있다면 허무에의 경도가 보다 심화돼 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노루아지>의 서정 선상에 놓여 있는 “오월”“눈싸움” 등의 작품 속에서 우리는 그의 특수한 상징체계를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성욱’과 ‘노루아지’를 통한 행복과 평화 추구의 상징체계다. 곧 ‘성욱’은 단순히 한 가정의 재롱동이가 아니라, 그것은 인류의 행복과 미래를 약속하는 상징체계며, ‘노루아지’도 마찬가지로 티 없이 청순한 그의 눈으로써 평화를 상징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체계는 세계를 새롭게 보는 황우의 시심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들은 황우의 分身이자 詩魂의 상징체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耳順의 나이에도 이처럼 윤기 흐르는 작품을 쓸 수 있는 것은 어떤 때문인가 이 점은 그의 남다른 일면이기도 한 것인데, 아무래도 넘치는 그의 生命愛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삶에의 뜨거운 애정이 그의 詩魂을 지칠 줄 모르게 달궈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지러운 당신의 그 표정에
문득 문득 던져 주는 그 소녀의 미소는
간간이 바람이 쏠리는
잡초 속의 해인사 양귀비꽃이었다
당신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헤매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부질없는 억측으로 스스로 슬퍼하고 있나니
- <잡초 속의 해인사 양귀비꽃> 일부
이처럼 그에게는 나이도 잊은 애정의 불꽃이 타고 있는 것이다. 이 삶에의 정열 그것이 인간을 아름답게도 보고 사랑하기도 하며, 인간의 불행을 괴롭게 연민하는 원동력이 되어주는 것이다. 耳順의 나이에도 “잡초 속에 피어 있는 양귀비꽃”과 같이 매혹적인 여인을 가슴에 품고 살 수 있는, 이 정열이 바로 그의 예술을 새롭게 꽃피워 주는 원동력이다. 그런데, 이 양귀비꽃은 잡초 속에서, 그리고 禪境의 寺刹 안에 피어 있기에 더욱 이색적인 생명감을 암시 받게 된다. 이 강렬한 생명감은 단순히 소재(대상)의 실존에서만이 아니라, 상관적으로 시인 자신의 내부에서도 똑같이 타고 있는 정열이라는 데 시적 의의가 있다. 이러한 삶의 정열은 일차적으론 그의 작품 세계를 가장 밝게 장식하고 있는 동화적 세계를 그려주는 원동력이 된다. 제5시집에서도 “새싹”“봄이 오는 가정”“동방의 태양”“오월”“눈싸움” 등의 세계가 그것이다. 또 이러한 세계는 여전히 인간의 행복과 평화 추구를 구심점으로 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그런데, 이런 동화적 세계와는 또 덜리 어둡고 불행으로 점철된 연민의 세계가 있다. 이것도 역시 앞의 것과 발화점을 같이 하고 있기는 하되, 보다더 휴머니즘 쪽에 뿌리박고 있다는 특색을 지닌다. “패잔병”“석양”“낙동강”“밤의 꽃밭”“횡사”“인간을 보호합시다”“도레드의 진주”“교상구걸” 등 2부에 속한 대부분의 작품이 그런 경향을 띠고 있다.
뇌성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엄마, 아이 무서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엄마 어떻게 집엘 가지?>
그 빗속을 패잔병이
발을 쩔뚝거리며 걸어 나온다/ <엄마 아빠다, 아빠>
- <패잔병> 전문
이 작품은 짤막하지만 연민의 정이 매우 밀도 있게 압축되어 있다. 설정된 극한 상황과 그 상황 속에서의 상봉, 그것은 너무나 비극적인 것으로 우리의 감동을 크게 자극한다. 곧, 비극이 구조적으로 압축된 예다. 이런 연민의 정이 보다 역사적인 차원으로 심화되어 있는 것이 “낙동강”이다.
오늘도 나는 강 언덕에 서서
신라의 후예들이
쌓올리고 쌓올린 가슴벽들이
유수에 허물어져 가는 소릴 듣는다.
-<낙동강> 끝연
강물은 그 민족의 애환을 한 몸에 지니고 살아온 산증인이다. 낙동강은 서라벌적부터 이 민족이 겪은 애환을 같이하면서 흘러온 강물이다. 그러나 강물은 소리내어 말하는 법이 없다. 그 말 없는 흐름 속에서 시인은 뼈아픈 限을 듣고 있는 것이다. 들으면 들을수록 그것은 가슴 벽이 무너져 내리는 가락뿐임을 시인은 말해 주고 있는데, 여기서 시인은 역사적인 허무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애환의 세계를 거쳐 그의 시는 드디어 달관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공자는 나이 60에 그의 귀가 순해졌다고 했다. 귀가 순해졌다는 것은 남의 말을 부담감 없이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뜻한다. 이름 좀더 부연하자면, 타인의 말이나 사회적인 제도 또 여러 가지 자연의 法度까지도 부담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아량이 생기게 된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순이란 무턱대고 남의 의견에 좇아 찬성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不惑이나 知天命의 과정을 지나고 자기 세계관이 확립된 후에 현전의 세계를 보다 깊이 이해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보다 높은 차원에서 사물을 보게되고, 본질을 꿰뚫어 앎으로써 사물에 대한 포용력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제5시집 가운데서도 “인간이기 때문에” “흰콩 검은콩”“경로석” 등의 세계는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순의 궁극적인 목표는 달관에 있다. 달관에 이르는 길은 허무를 뛰어넘지 않고서는 갈 수가 없다. 황우의 작품에 종종 허무가 등장하는 것은 바로 달관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전초 징후다.
비가 내리고 있다
천천히
억수히
내용을 다 도둑맞은
고분이
비를 맞으며
그 외엔
아무 것도 볼 것이 없다
- <지금은 우중> 전문
이런 허무적 세계를 감정 없이 담담히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달관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뜻한다. 부장품을 송두리째 도둑맞은 고분, 그것은 철저히 허무적인 것이며, 거기에다 비까지 억수로 내리는 상황은 허무감 위에 절망감을 중첩시킨 것이다. 이러한 허무적 절망감을 극복하는 힘은 선적이라 볼 수 있는데, “수향사2”에서도 그런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는 禪的 인식력으로써 현실적 허무를 초극하고, 나아가 생의 활력소를 확충해 나가고 있다. “길”은 그런 일면을 극명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늙은 황우가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
사바의 쓴 타액을 반추하며
어디서 오는 길인가
어디로 가는 길인가
결국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멀리서 가까이서
포성이 울려오고
길섶 이름 없는 풀꽃은
철없이 피고 지고
길은 외길
가도 가도
죽어서도 다 못 가는 길
- <길> 전문
자신의 삶을 達觀的인 시선으로 조명해 내고 있다. 그는 삶을 허무적 시점에서 바라본다. 무에서 출발한 삶은 사실상 출발점도 귀착점도 없기 마련이며 따라서 삶 자체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포성을 울리는 살육의 전쟁까지도 궁극적으로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는 무의미함을, 이 작품은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은 그가 도달한 가장 깊은 경지다. 특히 “죽어서도 다 못 가는 길”이란 末句는 일상적인 삶을 새롭게 규명하는 깊은 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죽음으로써 끝맺는 삶이 아니라, 法空의 세계로써 또는 노자적 도나, 정명도의 성리로써 지속되는 생사 一如的 삶을 표상하고 있다. 이제 황우는 확실하게 달관적 경지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이런 달관적 경지에서 이루어진 것이 佳篇 “쓰르라미”이다.
쓰르람 쓰르람
이 나라엔 바보가 없다
다만 황우란 바보가 있을 따름
더위도 추위도 분간 못하고
년중 검정두루마기를 입고 다니며
쓰르람 쓰르람
천성이 술을 좋아하여
인도에 오줌을 갈기다가
제풀에 쓰러지며 쓰르람 쓰르람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니다
쓰르람 쓰르람
- <쓰르라미> 전문
무아적 경지에서 그려낸 자화상이다. 그것은 사회 속의 인간이라기보다 자연 속의 인간이요, 선을 그을 수 없이 자연과 완전히 동화된 인간이다. 그것은 인위적 삶이 아니라 무위적 삶을 사는 인간이며, 이순의 경지가 압축된 삶이다.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자기를 버린 데서 얻어지는 삶이며, 나아가 우주 속의 ‘나’를 사는 삶이다. 이 삶을 통해서 그는 유한적인 자기를 초월해서 恒存的 존재로 비약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이순의 달관적 경지에 도달해 있다. 여기서 그의 철학은 출발하고 있다. 그의 예술의 윤기를 위해서 이를 더욱 심화시키는 일만이 그 앞에 남아 있는 절대 과제다. 69~99쪽
주어진 삶을 살다간 동심이전의 순수함
- 황우 이준범 시 세계 연구를 통한 오늘의 문학 좌표 설정
1. 글을 시작하면서
지난 삼월에 경남문학관에서 “제2회 경남문학제”가 개최되었다. 이 날 세미나의 주제가 “21세기 경남문학의 새 방향 모색”이었다. 그 중에서 주제의 발제를 받았던 중앙대 교수인 감태준 시인의 발표 요지는 경남문학의 성과와 아울러 문학이 어디서 자랐고, 어디에 서 있으며,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여기서 문제제기를 하고픈 것은, 그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찾는데 있다고 하겠다. 특히, 우리 문학이 벼랑 끝에서 몸살을 앓고 있다. 이는, 경남문학이 자란 토양을 무시할 수 없으며, 그 토양 위에서 뿌리를 박고, 영양분을 받아 푸르게 성장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지극한 섭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제기된 문학의 좌표는 첫 번째 가락(리듬)을 통해 나타나야 하며, 이미지에 대한 소견을 피력하면서, 시의 생명이 진정성, 상상력, 이미지의 신성성과 강렬성에 있다고 제시했으며,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는, “경상도 가락”을 가지고 사회 정치적 관심을 비롯하여 문명 비판적, 인생론적, 존재론적 관심을 가지면서 전통서정시에 대한 新感覺으로 실험적인 시를 창작하되, 경남의 자연과 생활환경 속에서 찾아야 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동안 깊은 사유에 빠지게 되었고, 새로운 창작활동의 방향성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고민하던 중에 다음의 시를 읽게 되었다.
쓰르람 쓰르람
이 나라엔 바보가 없다
다만 황우란 바보가 있을 따름
더위도 추위도 분간 못하고
연중 검정두루마기를 입고 다니며
쓰르람 쓰르람
천성이 술을 좋아하여
인도에 오줌을 갈기다가
제풀에 쓰러지며 쓰르람 쓰르람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니다
쓰스람 쓰르람 - 이준범「쓰르라미」전문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위의 시에서 뜻하는 바가 하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선생의 시를 더 읽고 싶은 생각에서 경남문학관에서 이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선생이 남기신 시집은 모두 5권이었다.
2. 황우 이준범 선생의 생애
황우 이준범 시인은 1922년 경남 창녕군 유어면 가항리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초근목피로 연명했던 고향인 창녕을 뛰쳐나와 홀홀단신으로 서울로 올라서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고, 교편생활에 이어 해방을 전후하여 동아출판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편집국장을 역임하면서 국내 출판계를 진흥시키는 데 공헌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학의 길로 접어들어 건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현대시인협회 심의위원장, 한국아동문학가협회 상임이사로 있으면서 아동문학 작품 발표는 물론 시집 5권을 남기셨다. 노년에 이르러 향토문학 발전과 후학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향 창녕에 “황우문화상”과 “황우문학상”을 제정하여 비용 전부를 그의 사재로 출연하였다. 또한, 선생은 고향사랑과 후배사랑은 신록처럼 푸르고 소탈했던 성품과 더불어, 창녕군 군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1999년 10월에 군민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선생의 유품인 책과 고서적을 고향 땅에 기증하였다.
특히, 2005년도 11월 28일자 중앙일보에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선생은 “광복절노래”와 “보리밭”의 작사자로 알려진 동갑내기 술친구였던 윤용하 씨를 알게 되어 선생의 시 “가는 길이 바로 가는 길이어 좋다.(57년작)”라는 시에 곡을 붙이게 되었는데, 그것이 그의 마지막 유고 작품이 되었고, 그 유작 악보를 건 40년 만에 윤용하 씨의 딸에게 전해졌다는 내용이 지상에 보도된 바 있다.
아무튼, 선생의 연보와 상세한 생애는 다음 기회에 보충하기로 하고, 참고로 선생의 가족은 부인 김을순 여사와의 사이에 1남2녀를 두셨고, 취미는 서예감상과 수석이며, 코가 남달리 컸기에 “대비(大鼻)그룹회장”으로서도 이름이 알려져 있다. 또한, 선생께서는 세상 인심이 어떻게 돌아가는 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1시간 동안이나 광화문 지하도에서 구걸했던 65원을 몽땅 신문팔이 소년에게 쥐어주었던 일화도 있다.
3. 황우 이준범 선생의 시 세계
선생의 첫 시집이 발행되었던 1960년대는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우리는 기억된다. 그것이 바로 광복과 더불어 자유를 누리게 되었고, 정부수립과 아울러 그토록 염원했던 우리나라 새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동족상잔의 아픔을 겪고 난 뒤에 오는 충격과 상처, 진정한 정의에 대한 열망이 4.19와 5.16이라는 시대적 산고(産苦)를 치러야 했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때에 시를 쓴다는 것은 투쟁의 대열에 선다는 것보다도 더한 아픔을 극복하지 않으면, 좋은 시를 쓰기에는 어려웠던 상황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의(義)”를 시의 정신으로 삼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시인으로서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시 짓기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그 결과로 1960년대에 세 권의 시집을 내었으며, 1970년대 1권, 1980년대 1권으로 총 5권의 시집을 남겼다. 그래서, 10년을 주기로 선생의 시를 초기, 중기 말기로 나누어 한번 살펴보기로 한다.
3.1. 전기작품세계와 시정신
한 사람의 시인이 탄생되기 위해서는 먼저 시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시인으로서 능력을 연마하여 창작 활동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생은 급변했던 시대를 살아오면서 일기를 쓰듯, 그 시대의 풍경을 시의 행간에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첫 시집이 광복 후 60년 초에 이루어진 점은 선생의 대학 졸업의 시기와 맞물려 있었기에, 뜻을 세워 그것을 실천하고자 했던 시기로 여겨진다.
첫 시집『황우』를 펼쳐보면, 서문에서 “처음으로 젖꼭지를 물리는 산모의 미소는 차라리 남의 눈이 수줍다. … 산아의 골상이 단정하질 못하고 안면이 협소한 데다 처신마저 약삭빠르질 못한 주제에 이름하여 ‘황우(黃牛)’라 붙었더니… (산파의 도움으로) 산실을 나서면서 휴-숨을 돌이켰습니다. 생명만은 건졌다.”고 했다. 이는 시인으로서 첫 생산품을 내기 위해 어떤 시정신으로 시의 터를 잡았는지 잘 말해준다. 그래서, 표제시「황우」를 한번 읽어보지 않을 수 없다.
황우는/ 아슬히 忘失했다/ 크낙한 울음과 함묵을 생각다가// 난맥한 혈통/ 분뇨의 시궁창/ 그렇게도 아름답던 장미꽃도// 표정도 색채도/ 저음도 없는 허허한 고요/ 광막한 들녘에서// 황우는/ 넌지시 반추하며 기동한다/ 하늘과 대지와 어둠을/ 아름히 호흡하며// 시침은 언제나 종점에서/ 출발이 마련되는 것// 황우는/ 餘地로 姿勢한다// 길은 없어도 갈 길은 있어/ 다시 여명으로 치뻗는 銳角은/ 義로써/ 네 발의 행동을 앞섰다. - 「黃牛」전문
위의 시에서 우리는 마지막 연에서 드러내 보이는바와 같이 선생의 시작(詩作) 정신이 “의(義)”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시 쓰기에 대한 선언으로 그치고 있기에 그 구체적인 모습을 느낄 수 없다. 단지, 시를 통해서 드러나는 ‘실망’과 ‘크낙한 울음’, “난맥한 혈통‘과 ‘분뇨의 시궁창’에서 느껴지는 상황만을 추상적으로 만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시를 읽을 때에는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그 시가 태어난 시대와도 연관지어 생각해 보아야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름지기 시인이라면,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하고, 사회 정의를 실천하려는 자세와 한 나라 국민으로서의 역사관이 투철해야 인간사회에 대한 애정과 비극을 껴안을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 이를 바탕으로 좋은 시를 써서 읽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줄 수 있다. 선생의 첫 시집을 살펴보면, 시 21편 중 표제시를 제외한 나머지 20편은 격동기의 불안한 상황을 제시한 시와 그 고달픈 삶의 풍속도,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처절한 모습과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 개인적인 상념의 시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무엇보다도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정의의 눈으로 바라본 60년대 초의 시대상이라 주목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원죄의 질서이기에/ 억년 바위의 땀은 종로 시가에 번져 오고/ 부황난 호흡이 기류로 흘러// 영악한 사람들은/ 제마다 地軸을 안고/ 허욕의 부담으로 相殺하며 돌아가는데/ 아득한 시간에 戰友들은 제 이름은 불러보지 못하고/ 겨레의 이름 밑에 쓰러져 갔느니/ 북악은 남산을 돌아서며/ 한강은 역류를 증언한다// 인간이 인간을 불신하는 距離에도/ 한결로 태양은 밝혀오며/ 지열은 원색의 꽃을 피워/ 언제나 미래를 충실케 하는 것// 종은 은은히 울어/ 그 먼 여운으로부터/ 이제 신은 가슴과 가슴에 내려와 실존케 하라// 지금 우리는/ 熊膽을 씹는 건강을 찾아/ 배 아픈 약으로 배를 다스려/ 어긋난 지층의 율법을 요리할 시간// 가로수에/ 오동나무꽃이 피는 계절이 찾아오면/ 그 땐 우리 太平路로 황우를 몰아/ 새로운 대열을/ 의미하자. -「의미」전문
위의 시 이외에도「흑사와 파도」,「태풍 케리-호」,「어둠을 밀고 가는 행진」에서 격동기의 상황과 그 불안들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인생의 처절함과 인심의 각박함을 다음의 시에서 더 찾아볼 수 있다.
砲門 앞에 선 내 심장에다/ 쇠잔한 생명 포대기를/ 내 던진/ 凍死!// 구걸은/ 차라리 강도보다도 비겁한/ 어처구니없는 인간 무능의 소위라/ 주위는 너를 버려 얼어죽게 하였나니/ 깍두기를 박아쥔 언 밥덩이// 餓死가 가지고도 다 먹지 못하여/ 이토록 人間事란 悽然한 건가// 내 弔意 貧寒으로 지극하오니/ 망령되어/ 미진한 생전 모사에/ 그대 어찌 유감됨이 없으랴만……// 아침해여/ 꺼적 덮인 위에도/ 따스히 비추시어/ 이미 간 주검을랑 冥目하게 하옵소서 -「凍死」전문
위의 풍속도 외에도「구걸」과 「파리」,「溺死體」에서 그 시절의 참상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때의 참상을 체념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정신만은 살아 숨쉬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성찰(省察)이 우선돼야 하고, 그 성찰을 바탕으로 새로운 해법을 찾는 것이 지극한 순리로 해석된다. 이에 대한 시를 한 번 살펴보자.
첩첩 억눌렀던 학대의 분노가/ 정의의 혈탄으로 산화한/ 아아 4월의 그 충격! <중략> 자유도 인권도 빼앗긴/ 많은 사람은 기아에 떨었고/ 어떤 자는 억울히 생명마저 잃어 <중략> 양식과 농우 팔아 등록을 하고/ 피를 팔아 학비 벌던/ 민주 제단에 바치온 前衛의 희생 앞에 <중략> 보리 익는 남풍에 뻐꾸기도 울어울어/ 산천은 녹음으로 짙어가건만 <중략> 지나간 4월의 거룩한 殉義/ 젊은 그 생명들이 남기고 간 과업을/ 황우의 銳角으로/ 내 묵연히 겨냥해 보노니 - 「6월 街路樹에 기대서서」중에서
이러한 충격에서 시인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사회정의와 비극에 따른 깨끗한 양심과 인간애로 울부짖는 의분을 삼키면서,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가기 위한 새로운 다짐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며, 그동안의 상처를 꿰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다음의 시를 읽으면 보다 확연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황우는/ 답답한 하늘을 들이받았다// 아무런 反響도 없이/ 구름이 銳角에 와 감긴다// 황우는/ 산악같은 울음을 울었다// 아무런 음향도 없이/ 생활이 턱 앞에 와 강조한다// 황우는/ 대지를 걷어찼다// 황우는 자신 안으로 굴러 떨어지며/ 대지에 금이 갔다// 황우는/ 금이 간 언저리를/ 피맺힌 혀로 쓰윽쓰윽 핥는다. -「금이 간 황우」전문
위의 시에서 드러나듯 그 때의 상황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없을 것이다. 그러나, 타다 남은 한 줌의 정신만은「지렁이」나「내가 곤란할 때 남을 도웁시다」라는 시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첫시집『황우』는 비극성 앞에 치열한 삶을 살아간 시인이, 따스한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며 함께 고통을 나누고자 가시를 움켜쥐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제2시집『탱자나무꽃』이 바로 아픔을 움켜쥐려는 시도에서 첫 시집과 연결시킬 수 있으며, 태풍이 지나간 흔적을 치유하고자 하는 일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폐허를 일구어야 했고, 꽃을 심는 마음은 아름다움을 심는 마음과 다를 바 없거니와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사실 그동안 한국적인 체취를 觸感해 보느라고 내 딴엔 끙끙 앓아 보았으나, 무척 힘겨웠음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또 이를 어머니의 영전에 바친다는 덧붙임에도 눈길을 끌었으나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고, 제2시집에 게재된 시 35편을 좀더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꽃을 제목으로 한 시 11편을 빼고 나면 모두 24편이 남는데, 그 중에서 앞서 언급이 했듯이 상처를 치유하는 시편들과 농기구를 챙겨 들고 일상의 생활로 돌아가서 제몫을 다하고 있는 풍경들을 엿볼 수 있다.
1. 오동잎 벌레 먹은 풍경이/ 황우의 뿔에 가 걸렸다// 휘저어도 떨어지지 않는 풍경을/ 울어 황우의 목이/ 수세미처럼 쉬었다. 2 태양이 꺼지면/ 億兆 星群이 의연 제자리에 빛나고/. 어둠을 사이 하여/ 서로가 부르는 짐승들의 울음이/ 정작 인정보다 아쉽다 3. 고추잠자리 날름히 황우의 등 너머/ 수수깡 울타리 밑 흰 사금파리를/ 저녁연기가 풀 없이 덮어 긴다 4. 아침 햇살이 황토보다 짙은 황야에서/ 님을 찾는 황우의 울음이/ 큰바다 물길로 밀어/ 하늘 땅 끝에 가 메아리진다. - 「風景」전문
그렇다. 위의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목이 수세미처럼 쉬었”고 “짐승들의 울음이 정작 인정보다 아쉬”우며, “ 황토보다 짙은 황야”를 “큰바다 물길로 밀어” 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재건의 기치아래 한마음이 되었고, 조국근대화의 물결을 맞이하게 되면서 우리도 잘 살아보자는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되기도 했다. 선생의 시에서 보여주었던「폐허의 공장지대」는 폐허를 재건하기 전의 모습이다. 이를 움직이는 공장으로 건설하려는 망치소리와 밭을 가는 농부들이 보습을 땅 속 깊이 묻고, 소를 몰아 땅을 일구었고, 어미 소를 찾는 송아지의 울음소리로 잃었던 기운을 떨쳐버리고, 제각기 자기 자리로 돌아가 생업에 전념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뚜들기자 뚜들기자 뚜들기자/ 여기다 여기다 여기다// 온 식구가 도리깨가 되어/ 온 국민이 도리깨가 되어/ 뚜들기자 뚜들기자 뚜들기자// 뚜들겨야 산다 뚜들기자 뚜들기자/ 뚜들겨야 잘 산다 뚜들기자 뚜들기자/ 온나라 힘을 다하여 뚜들기자 뚜들기자// 가난과 부정을랑 몰아 내고/ 조국을랑 굳게 다져/ 뭉글으자 몽글으자 몽글으자// 온 식구가 도리깨채가 되어/ 온 국민이 도리깨채가 되어/ 뚜들겨 뚜들겨 몽글으자 몽글으자/ 뚜들겨 뚜들겨 몽글으자 몽글으자. -「보리타작」전문
이렇게 재건은 무르익어 갔고, 선생의 시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눈에 생생하도록 그려져 있음을 위의 시에서 느낄 수 있다. 읽으면 그 율동이 저절로 힘을 모으게 하듯 마치 노동요를 부르며, 접혔던 허리의 아픔도 견디어내었던 조상들의 슬기를 그대로 이어받아 생산성을 높였던 현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고속성장의 지렛대가 되어 잘 살기 위한 새로운 깃발을 집집마다 나부끼게 하였고, 삼천리 강산 들판마다 깃발이 휘날리듯 신바람에 젖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생의 시 작업도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제3시집『주춧돌』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제3시집은 모두 59편이 실려 있는데, 2편은 이미 발간된 시집의 표제시와 建大新聞에 게재되었던 시를 빼면, 실제 56편의 詩를 가지고 새로운 시대의 ‘주춧돌’을 놓아 ‘황우’의 네 발을 튼튼히 받치고자 했으나, 만족하지는 못했던 같다. 이유인즉, “시는 현실을 비평하고 고발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현실을 비평하고 고발할 만큼 영리하지도 용감하지도 못했습니다. 보고 듣는 귀와 눈이 둔하고 보니, ‘황우’를 양육하는 데 현명치 못하여, 외양이 비뚤어지고 사상이 궁색하기 짝이 없으니 이 ‘황우의 자화상’을 보게 된다면, 그 날의 산파는 오늘에 와서 과연 뭐라고 충고해 줄는지”라는 시집의 서문이 이를 잘 대변해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표제시「주춧돌」을 읽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없다.
큰 싸움을 치르고 남은/ 폐허의 주춧돌을 안고/ 다시 놓을 자리를 찾아/ 나는 오늘까지 왔다. -「주춧돌」전문
위의 시는 아주 짧은 시지만, 그동안 읽어왔던 시들을 기억하면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시인의 서문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시이기도 하다. 이 3시집 뒷부분에 ‘책 뒤에’라는 조동일(趙東一) 선생의 글이 짤막하게 덧붙여 있다. 그 내용 중 “시를 쓴다는 것은 기술이기는 하지만 그리 별난 기술이 아니다. 천분(天分)이니 영감(靈感)이니 하는 오랜 관념, 면허를 요하는 직업이라는 새로운 관념에의 집착이 남아 있는 한, 창의성의 자유로운 발로가 저해되는 기술이다. 우리는 누구나 시인이며, 시인은 모든 사람과 같은 의미에서 시인인 한해서 생명에 넘친 시는 탄생한다.”는 말과 함께 표제시를 언급하면서, “우리가 시인에게 기대하는 건 이러한 예지(叡智)이다. 시는 생활에서 시작되나 생활을 단순하게 재현하는 푸념에 그치지 않는다. 그 집약적인 의미를 모두가 다 느끼고 있지만, 모두가 다 잊고 있는 의미를 튼튼히 틀어쥐고 경종(警鐘)을 울려야 한다. 일상적인 분망과 피로는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인을 필요로 한다.”는 글에서 선생은 힘을 얻었으리라 여겨진다. 결국 시인이란 역사의식을 갖고, 사회정의를 위해서 노력하겠다는 신념이 사라지지 않는 한, 구호적인 폐단을 극복하고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으며, 올바른 역사의식은 올바른 윤리관으로 이어지고, 사람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지 않는 한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의 눈뜸으로 인해 좋은 시를 얼마든지 생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귀뚜라미는/ 가을에만 우는 것이 아닙니다/ 여름에 우는 놈도 있습니다// 귀뚜라미는/ 밤에만 우는 것이 아닙니다/ 낮에 숨어 우는 놈도 있습니다// 여름에 우는 놈은/ 저와 같이 비관하라고 합니다// 낮에 우는 놈은/ 저와 같이 불평하라고 합니다. -「귀뚜라미」 전문
위의 시는 내용이 긍정적인 것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시인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의 흔적을 읽을 수 있기에 여기에 따온 것이며, 또 다른 시「사랑」에서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안목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나아가,「대낮」이라는 시는 상상력을 유발케 하는 시로써 좋은 본보기가 된다. 아무튼 선생이 종로 네거리에서 본「허수아비」시를 한 번 읽어보면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해보자.
‘누굴 허수아빈 줄 아나 봐’// 그렇습니다/ 바로 그 허수아비들이/ 종로 네거리를 활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쫓길 참새는/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누군 허수아비 아닌 줄 아나 봐’ -「허수아비」전문
그래서, 선생은「팽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시가 가서 닿는 종착역에서 허무를 잠시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채는 가차없이/ 내 육신을 친다// 내 생명은/ 내 육신의 회전으로만 지탱한다// 지완(遲緩)은/ 의욕의 해이// 나는 내 생명을 연소시키는 외의/ 일체의 잡념을 거부한다// 쳐라 쳐라 쳐라……// 내 육신은/ 천축과 지축을 맞물어 회전하고/ 일월은/ 내 육신을 축으로 회전하여 立命한다// 내 회전의 정지는/ 모든 뜻의/ 종착이요 허무이다. -「팽이」전문
그러나, 허무를 딛고 새로운 힘을 얻기 위해 노력한 결과 선생은 또 다른 시「성숙의 가을」을 빚었다고 볼 수 있다.
순여야 정말 니 어얄라카노/ 저 푸른 하늘 아래 오곡이 무르익고/ 과수원 능금알이 이렇게 빠알갛는데// 내일 모래면 추석/ 가슴이 그만 터질라 안카나// 보래 순녀야/ 이 산과 들은 니도 알다시피/ 우리네 조상들의 피와 땀과/ 그 억센 손때가 묻은 천량 옥토가 아닌가베// 대대로 갈고 거두어 아들 딸 낳고 살며/ 추석 명절 때가 제일 좋다 안카다나// 순녀야 정말 니 어얄라카노/ 남저고리 홍치마에 연지 찍고/ 저 황금 벌판을/ 표범같이 주름잡고 싶지 안니// 강물은 천년을 흘렀다지만/ 청춘은 잠깐이라는데// 미추룸한 니 머리채가/ 내사 두고 못 보겠다// 황우의 울음이 메아리치는/ 성숙의 이 가을을/ 순녀야 정말 니 어얄라카노. -「成熟의 가을」전문
이렇게 선생의 전기 시를 개략적이나마 살펴보았다. 이를 보다 깊이 점검하여, 선생의 시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새로운 문학좌표 설정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앞서 제기했던 문제와 연결하여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대체로 선생의 전기 시들은 우리와 같은 한 사람으로서 시인의 삶을 치열하게 살고자 했던 시의 뜻을 세워 그 이름을 “황우”라 명명하였고, 시인의 눈에 예지의 촉각을 세워 급변한 시대 흐름에서 만나게 되었던 일제강점하의 출생과 더불어, 20대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상경(上京)하였던 선생은 광복의 기쁨도 잠시, 힘든 생활 속에서 40대에서야 만학의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으나, 졸업 무렵인 1960년대 격변의 시대를 다시금 맞이하게 된다. 시대의 불안 속에서 인간 사회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을 가져 연민과 울분, 저항과 순교적인 양심으로 사회를 비판하고, 투철한 역사의식 속에서 시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면서 첫 시집『황우』를 내 놓았으나, 그 역시 그 한계를 절감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로 이어지면서 최후의 주춧돌을 놓고자 했을 것이다.
새롭고 단단한 주춧돌을 놓기까지 인간의 비극성을 노래한「금이간 황우」을 비롯하여「익사체」,「지렁이」,「구걸」,「파리」,「황우의 일과」와 같은 시들과 현실적 불안을 상징하고 있는 시「흑사와 파도」,「태풍 케-리호」,「어둠을 밀고 가는 행진」에서 처절한 삶과 각박한 세상 인심을 체험하면서 인간애를 발휘하고자 했음을 느낄 수 있다. 특히, 「6월 가로수에 기대서서」란 시에서의 성찰과 「내가 곤란할 때 인간을 도웁시다」라는 시에 그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이어지는 제2시집에서는 앞선 불안과 고통 속에 받은 상처를 치유하려는 뜻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고뇌하였으며, 그 결과로 빚어낸 시「풍경」을 비롯하여 꽃들에 대한 시에서는 전통 서정과 한국적 체취(體臭)를 드러내고자 했다. 이는, 국토 재건과 잘 살아보자는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조국근대화의 기치 아래 성실하게 사는 모습이 무엇인지 시를 통해 표현하기에 이르렀으며, 시「보리타작」에서 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제3시집에 이르러 전기 시의 결실을 거두기 위해「주춧돌」이란 표제시를 통해서 새로운 번뇌와 갈등을 거듭하면서 확고한 시정신을 정립하기에 이른다.
시 창작기법에 의한 작품론적 입장에서 선생의 시를 살펴보면, 수사적 또는 구조적 기교보다는 바라본 세계를 관찰자의 시점에서 담담하게 본대로, 있는 대로, 느낀 대로 솔직하게 표현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핵심은 외관법(外觀法)에 의한 묘사(描寫)이다. 나아가, 작가정신의 기저에서 뽑아 올린 직관을 통한 표현에서 발로되는 상상력의 확장에 따른 새로운 시각을 보여줌과 경상도 사투리의 억양을 그대로 드러내는 대화체적인 시적 표현은 나름대로 시적 표현의 보편성과 적절성을 확보하여 감동의 파동을 치게 한다. 특히, 원시적인 용어의 선택과 향토적 체취를 느끼게 하는 작품들에서 그 순수성과 본능적인 야성미와 더불어 선생의 비극미를 보여주는 작품 군들로 거의 주로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만, 비극이 곧 비극 자체만이 아니라 극복이라는 한계성을 탈피한 비극을 예술로 승화시키고 있으며, 야성미 또한 선생의 소박성과 순수성, 그리고 애수와 함께 조화를 이루면서 한국적 정서와 만나서 그 건강성이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 작품의 특장(特長)이라고 볼 수 있다.
3.2. 중기작품세계와 양면성 극복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을 비추는 빛은 크게 두 가지다. 낮을 비추는 태양이 있는가 하면 밤을 밝히는 달이 있다. 이 모두 빛이다. 그래서, 태극의 원리는 천지의 기운이 서로 상생하면서 조화를 이루는 우주의 원리 속에서 생명을 유지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태양은 언제나 둥글고 달은 그대로 있으나 이지러짐과 채움을 반복하는 것 같이 보인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악은 원래 하나의 연상선상에 있는 것인데도 상반된 개념으로서 이해하고, 서로 배척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이를 토대로 흑백원리라는 이름 하에 서로 편을 가르고, 서로 화해하지 못하고, 서로 상대를 향해 총부리를 겨루고 있는 우리에게는 남북분단이라는 깊은 반목의 골이 파여져 있어 서로 불행을 자초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나아가, 문단 세계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순수니 참여니 하면서 많은 논란을 거듭해 왔던 것도 너무나 잘 알려진 실상이었다. 그래서, 문학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도 피할 수 없는 흐름 속에 만나게 되는 하나의 장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선생은 문학에 대한 뜻을 세웠고,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였지만, 이러한 문제를 안으면서 혼돈의 세계에서 사유의 깊은 수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 염두에 두고 선생의 초기작품세계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과정과 실제 작품에서 드러나는 모습들을 한번 고찰해보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의 중기작품세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중기에 창작하고 정리해서 펴낸 제4시집『노루아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시집에서는 31편의 시가 실려 있다. 그리고 말미에「시에 있어서의 상상력」이라는 선생의 글이 실려 있다. 여기에서 시와 아울러 시에 대한 견해를 알아볼 수 있는 글이 실려 있음은 지금까지 시정신을 세우고 나름대로 시의 주춧돌을 놓아보았으나, 그것이 완성의 단계에 이를 수 없는 또 하나의 시작임을 알아차린 단적인 예라 하겠다. 그래서, 이 시의 표제시 또한 성장을 다한 ‘황우’가 아니라 어린 송아지의 모습과 같이 ‘노루아지’로 변한 것이다. 즉 ‘소’가 ‘노루’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우선 이 표제시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어메야 어메야/ 나 혼자 우야라카노// 풀국 풀국 풀국새야/ 넌 와 청승맞게 울고 있지// 사람 냄새가 싫어/ 화약냄새가 죽어도 싫어// 방울새야 방울새야/ 나하고 놀자// 어레 산다화꽃 좀 보래/ 산다화야 산다화야. -「노루아지」전문
위의 시에서 ‘노루아지’는 외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앞서 ‘황우’는 새끼를 낳으면 송아지가 된다. 그 새끼들은 이웃의 송아지들과 놀 수 있고, 엄마와 함께 재롱을 피우면서 오순도순 살 수 있기에 함께 놀 친구가 있기에 외롭지 않다. 그런데, 노루아지의 상황은 좀 다르다. 외로운 모습을 하고 있기에 새를 바라보면서 그리워하고, 꽃을 보고도 그리워한다. 새도 노루아지와 같이 동물이 아니고, 꽃도 노루아지와 같이 동물이 아니다. 같은 또래의 노루아지들도 제각기 숨어서는 나오지 않는다. 아마 그들은 자칫 잘못하다간 힘센 동물에게 잡혀 먹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아무튼 위의 시로서는 상황은 이해가 되겠으나 노루아지가 찾고자 하는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왜 노루아지가 고민하고 있으며, 어떤 문제에 천착해 있는 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 다시 시집을 펼쳐서 더 읽어볼 수밖에 없다.
태양을 잃어버린 소년이/ 태양을 찾아/ 하이얀 외줄 길을/ 우쭐우쭐 걸어간다// 가도 가도/ 하이얀 외줄 길/ 풀 한 포기 볼 수 없고/ 나비 한 마리 날지 않고// 끝없이 뻗어 있는/ 하이얀 외줄 길/ 바람 한 점 없고// 가다가/ 휘파람을 불고/ 무지개도 휘두르며/ 하이얀 외줄 길을/ 우쭐우쭐 걸어간다. - 「태양을 찾아가는 소년」
위의 시는 앞서 읽은 ‘노루아지’와 마찬가지로 외로움의 연속이지만 그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찾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중기의 시작에서 언급했듯이 해와 달이 모두 빛이지만 여기서는 해를 잃어버렸다며 찾아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길은 끝이 없다. 그래도 걸어가고 있다. 해답 없는 해답을 찾아내는 것은 우리가 극복해야할 과제들이다. 그 과제를 풀어내는 것이 어쩌면 삶의 연속인 것임을 선생은 알아차린 것이다. 예를 들면 가정을 꾸러나가는 가장으로서의 살림살이와 국가에서의 경제문제, 그리고 기술을 개발하는 새로운 창조를 실현할 수 있는 기술개발의 문제, 분단을 극복하는 통일의 문제 그 외 수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상황에서 이를 풀어가기란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니다. 그렇다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삶이다. 그래서, 다음의 시를 읽고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보자.
빨강 불이 켜졌다/ 가야 하는데/ 파랑 불이 켜졌다/ 어디로 갈까/ 노랑불이 켜졌다/ 돌아서 가자. - 「신호등」
위의 시에서 길은 양극단을 가는 두 개의 길만이 있지 않고, 또 하나의 길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세 길이 아니라, 두 길밖에 없다. 다시 양극단이라는 말이 된다. 그래서 극복할 수 없는 길임을 알고 그 한계에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음을 드러내고 있다. 되돌아 걸어가야 한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 되돌아가는 지를 알기 위해서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누가 제 고향 자랑이 없을까만/ 나는 내 고향 내 산천이/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라// 길가에 버려진 돌 하나에도/ 농부가 갈다 둔 한 줌 흙에도/ 나는 조상님들의 숨길을 느낀다// 내 어릴 적 백조의 전설과/ 풀국새 전설이 애련했고/ 굽이굽이 낙동강 나루터엔/ 오가는 정이 풀꽃처럼 피고 졌다네// 아, 화왕산/ 사철 푸른 서기 안개처럼 끼어 있고/ 까막까치 울음소리에도 뼈가 있다던/ 우리 고장의 主山/ 위엄 있는 그 풍모는/ 우리 고장의 기상// 비사벌의 옛 고장/ 창녕은 제 2의 경주// 만옥정 비탈에 선 진흥왕 척경비와/ 술정리 동 3층 석탑은 국보로 이름이 높고/ 보물 관룡사 대웅전, 약사전, 석조여래좌상을/ 비롯하여/ 송현동 석빙고 석불좌상, 봉선대 석가여래/ 좌상, 교동 탐금당 치성문기비, 술정리/ 서 3층 석탑이 있으니// 사적 화왕산성은/ 임란 때 곽 재우 장군의 싸움터로 유명하고/ 구천삼지가 있었다는 산정에는/ 창녕 조씨의 득성비가 서 있다// 그리고 사적 교동 고분군은/ 비사벌 고관들의 무덤이었다는데/ 일정 때 지각 없는 인간들에게/ 도굴되고 밭으로 일구어져/ 지금은 수십 기만 남아/ 뜻 있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아, 내 고향 신라 비사벌의 옛 고장/ 나는 만옥정 박물관을 찾아/ 한나절 슬기롭고 순박했던/ 조상님들의 그 얼을 새김질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괴어 넘친다// 누가 제 고향이 없을까마는/ 나는 고향 창녕의 이름과 함께라면/ 내일 고향이 문둥이의 지옥이 된다 해도/ 나는 나는 고향에서/ 고향에서 살고 싶어라. - 「내 고향 창녕의 이름과 함께라면」
압축되고 짤막하게 씌어졌던 선생의 시가 여기에 와서는 할말이 많아진다. 밤을 세워도 끝이 없었던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선생의 회상 또한 끝없이 펼쳐진다. 그때는 흑백이 없었다. 그 때는 선하고 악함이 없는 순진무구(純眞無垢)한 그 자체였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한마디로 철없던 시절이다. 그래서 철듦은 이미 퇴색해버린 오염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그곳에서는 이해타산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동심의 세계에서도 이해타산이 존재함을 선생은 손자에게서 읽어내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나쁘다고 드러내어 말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좀더 시를 읽어보기로 한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안 할거야/ 왜 성욱아?/ 할머닌 엄마한테 갈 때 신으라고/ 구두 사주고/ 할아버진 안 사주었잖아/ 할아버지 보여줄까// 요 놈/ 그럼 나도 성욱이 안 할거야/ 왜 할아버지?/ 넌 할머니하고 마포형한테 가면서/ 할아버진 안 데리고 갔지 않아// 그럼 나도/ 할아버지 안 할거야/ 왜 성욱아?/ 할머니가 날 키웠지/ 할아버지가 날 키웠어? - 「할아버지 안 할거야」
손자와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아들과 마찬가지로 가장 가까운 1촌이다. 우리가 단군과 촌수로 치면 1촌이다. 그러나 형제는 2촌이다. 그런데, 그렇게 가까운 1촌이기를 포기하고 있는 모습이 어쩌면 슬픔이다. 그 슬픔의 밑바닥에 이기심이 자리하고 있으며, 본능에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동심이전으로 돌아가야 함을 선생은 깨닫게 된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한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힘의 원천은 바로 이러한 이기심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는 순간, 선생은 이를 이해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기에 손자를 나무랄 수도 없다. 그래서 말을 할 수 있으나 들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깊은 산 바위 위에 앉아서/ 침묵의 말씀을 들었다//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광화문 네거리 소음 속에서/ 침묵의 말씀을 들었다//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잠자리에 누어 눈을 감고서/ 침묵의 말씀을 들었다//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어제도/ 오늘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 「침묵의 말씀」
위의 시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의문은 끝이 없고, 가야할 길도 끝이 없다. 오르지 침묵 속에 잠긴 선생의 모습은 삶의 지혜를 찾고 싶은 열의만은 남아 있다. 그러나, 선생의 시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읽혀지는 부분이 있다. 뜻을 세우고 열정을 가지고 주춧돌을 놓기까지는 열정이 있었다. 그 열정은 세상을 이끌어 가는 힘이 된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그 열정이 덧없음을 깨닫게 된 듯이 허무의 늪으로 깊이 빠져드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무기력함이 선생이 찾고자 하는 해답이 아니다. 그래서, 선생이 선택하게 된 것이 바로 ‘황우’가 소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소는 곧 노루가 되어 산천을 뛰놀고 싶어하지만, 외롭기는 역시 마찬가지. 하여, 가정으로 돌아와 손자의 순수성에서 찾아보려고 해도 손자 역시 이기심이라는 작은 덫에 걸려 있기에 실패로 끝난다. 그런데, 이때의 실패는 실패일 수 없다. 손자의 이기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다시 외로움조차도 인정하여야 함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침묵은 더 많은 말을 하게 하지만 들을 수 없다.
아울러, 선생의 시편들 중에서 더 읽어야 할 것이 있다면,「아기의 평화」,「철새」, 「뻐꾹새는 울고 있다」, 「울고 있는 蘭」, 「산이 좋아 물이 좋아」, 「이리의 눈」,「서울의 백주」들이다. 생각하면서 읽기를 권해본다.
간략하나마 선생의 중기작품세계를 살펴본 셈이 된다. 비록 해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집착에서 벗어나야 하는 지혜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시는 열정으로 쓰는 것이지만 그 열정의 뒤안길에서 조용히 침묵 중에 솟아나는 언어를 꿰어야 감동을 줄 수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선생의 시작법을 잠시 살펴본다면, 초기에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외관 법이자 직관에 의한 표현이 여기서는 생각하게 만드는 언어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게 하는 상상력을 유발함으로써 언어의 확장성을 살리는 지점에까지 도달하고 있다.
우리가 밥을 할 때에 물이 끓고 솥뚜껑에서는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밥은 끓는 순간에 쌀알은 정신을 잃고 자기의 형체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오히려 오그려든다. 그래서, 김이 솟은 다음 잠시 불을 끄고 뜸을 들이면 쌀알이 잘 퍼져서 밥알이 된다. 이처럼, 열정 속에 갇혀있을 때 시의 언어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상상의 확장보다는 움츠려듦에서 더 이상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응시한 후 관조적인 입장에 서게 되고, 뒤로 물러서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무엇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메모한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말하는 본래의 면목을 보고 그것을 표현해 내는 것이라고 하며, 시를 잉태하는 직관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미 선생은 시작에서 많이 시도했고, 압축의 묘미를 알아 가장 경제적인 언어로서 시를 빚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본래의 근원을 찾기에는 뜸들임이 있어야 하기에 사유를 발효시키기까지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점을 여기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을 창조의 원리인 상상력과 함께 새롭게 보는 눈이 필요함을 얘기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시 반복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황소가 소가 아니라 노루가 되어야 함을 뜻하는 말이고, 그것을 깨달았기에 힘이 센 성장의 소가 어린 노루 새끼가 된 노루아지는 동심의 세계로 나아갔고, 노루아지 역시 진실로 동심이 되기 위해 집착을 놓아버릴 수 있는 여유를 찾게 된 것이다. 그 여유가 바로 뜸들임을 한국의 아낙네들은 밥할 때마다 이미 깨닫고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이르러서 겨우 깨닫게 된 것일까!
3.2. 후기작품세계와 달관의 경지
초기 선생의 뜻을 세움에서 중기 하늘의 뜻을 깨닫고, 이제 후기의 세계를 어떻게 펼쳐야 할 것인지에 대한 사유는 머무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또 다른 돌파구를 찾기 위해 생각을 정리하고 모습을 바꾼 황우의 어린 송아지의 또 다른 노루아지를 성장시켜야만 했다. 그래서, 양극단을 초월하자면 집념의 수렁에서 벗어나 하늘의 섭리를 수용하면서 달관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월도 어김없이 흘러 지천명을 넘어 이순(耳順)을 맞이하게 되었고, 사나운 황우가 표범의 울음을 울었으나, 다시 노루아지의 목소리로 변하더니, 그 노루아지는 이제, 하늘의 뜻에 따르는 일벌이 되어 작은 날개를 앵앵거리고 있다.
선생의 여정은 바로 황우에서 출발하여 노루아지에서 꿀벌의 모습으로 외형의 모습은 보다 작아졌지만 사유의 깊이는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무거운 황우가 날개를 날은 격이 된다. 인간의 염원이 날고 싶다는 욕망에서 날틀에서 시작하여 거듭된 변형과 개선으로 오늘의 거대한 항공기가 되었고, 과학문명의 결과로 이제는 첨단무기를 싣고 사나운 이리의 눈을 달고 있다.
선생의 후기작품세계를 대변할 제5시집 『잡초 속의 해인사 양귀비꽃』은 제4집에서 보여주었던 시「天下大愚」가 꿀벌의 자세로 28편의 시를 생산하였다. 가만히 살펴보면 제시1집에서 있을 법한 시를 비롯하여 제4시집에 이르기까지 여태까지의 시들과 함께 어울려 있는 형국을 하고 있다. 그래서, 제5시집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읽어내기 위해서 서문을 살펴보자, “꿀벌이 꿀을 치듯 시도 빚어야 하는 것을 가짜 꿀을 만들어 내듯 시를 써 온 것이 아닌가 부끄러워하면서도 시작을 단념하지 못하고 … 내 나름대로의 인생을 살아가는 한 표현임을 자신” 하고 있다고 했다. 이는 어떤 의혹도 없이 이제는 시가 확실하게 그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징후가 된다. 그래서, 표제시를 한번 살펴보기로 한다.
고즈넉이 무르익는/ 십분 고혹적인 당신의 여자 얼굴 속에서/ 나는 순진하고 다정한/ 청초한 소녀의 얼굴을 엿보았다// 당신은 알고 있는지/ 당신의 소녀의 꿈은/ 당신의 심장 속에 감추고 있나요?// 어지러운 당신의 그 표정에/ 문득 문득 던져 주는 그 소녀의 미소는/ 간간이 바람에 쏠리는/ 잡초 속의 해인사 양귀비꽃이었다// 당신의 마음은 지금 어디를 헤매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부질없는 억측으로 스스로 슬퍼하고 있나니// 물끄러미 바라보는 당신의 그 윤기 띤 시선이/ 독사의 혀끝처럼 날카롭게/ 내 가슴을 사정없이 꿰뚫는 것을/ 당신은 은밀히 알고서도 말이 없는 걸까?/ 싱싱하게 숨쉬는 당신이란 그 여자의 色身에/ 그 우아하고 결백한 얼굴에 슬픈 사연의 感傷인 듯/ 불안의 전율인 듯 상기하는/ 함초롬히 붉은 포도주를 먹음은 듯/ 당신의 그 현기로운 입술 앞에/ 나는 바보야 줄이 끊긴 연이었다. -「잡초 속의 해인사 양귀비꽃」 전문
위의 시에서도 여전히 시인은 예지의 눈빛으로 사물을 응시하고 있다. 그런데, 앞서 상상력과 시를 논함에 있어서 상상력이 곧 사랑이라고 했다. “자기의 내적 경험 속에 타자의 내적 감정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면서도 욕구불만인 것이 인간이거늘, 마음으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으되, 현실은 없는 것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감동을 끄집어내어 새로운 발견을 시도하는 것이 시인이다. 그 감동을 지속시키고, 응축시키고, 발효시키는 것이 시이듯이 다시 소년 시절로 돌아가 호기심을 발동하고 있다. 특히, 선생은 “호기심이란 아이들에게 날로 싱싱하게 자라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적 호기심은 상상의 날개를 달고 자유롭게 비상”하게 된다고 했듯이, 그 ‘흥분’ 내지는 ‘전율감(戰慄感)’은 멈추지 않고 ‘뛰어난 이미지’의 힘이 솟아남을 의식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선생은 역시 앞서 언급했듯이 바보일 수밖에 없고, 어린 시절 날렸던 연의 줄이 끊겼던 그 황당함을 반추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애정의 불꽃은 아직도 타고 있다. 이것이 선생이 인간을 아름답게 보고 사랑하는 전기에 가졌던 인간애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연민의 세계에서 맛보았던 뜨거운 애정은 지금도 선생의 시혼을 깨워 지칠 줄 모르게 한다. 그래서, 좀더 선생의 시를 읽어서 후기의 세계를 좀더 명료하게 조명해보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맑은 물에 노는 작은 물고기는/ 맑은 물만 물인 줄 알고/ 탁한 물에 노는 큰 물고기는/ 탁한 물만 물인 줄 안다// 지사는 청류를 보면/ 몸을 씻어 지조를 고결하는 데/ 태만함이 없는가 반성하고/ 大器는 탁류를 보면/ 치산치수를 하여/ 국토를 기름지게 할 것을 걱정한다// 大愚는 청탁을 倂呑하고도 여유가 있고/ 그것을 다 토해 내고도/ 스스로 충만할 따름이다. -「淸而濁」
위의 시에서 우리는 앞서 살펴보았던 양극단의 논리에 대한 이해가 이뤄진다. 자기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든 문제를 자기방식대로 이해하고 해석하며 처리한다. 그것은 서문에 밝혔던 선생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내 나름대로의 인생을 살아가는 한 표현” 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스스로 충만할” 따름이라며 상대를 인정하는 여유를 가졌다는 점에서 성숙된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또 다른 시를 읽어보자.
할아버지 할아버지/ 왜 흰콩과 검정콩을/ 한 바가지에다 쏟아 넣으셔요?/ 오냐, 오냐 흰콩과 검정콩을/ 따로 따로 골라내기 위해서야// 이것은 검정콩/ 검정콩은 이 바가지에/ 이것은 흰콩/ 흰콩은 이 바가지에/ 이것은 흰콩/ 이것은 검정콩/ 이것도 검정콩, 이것은 흰콩// 할아버지 틀렸어/ 검정콩 바가지에 흰콩을 넣었어요/ 이번에도 틀렸어요// 그래 내가 실수했군/ 진우야 진우야 이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작은 실수는 말할 수 없이 많이 했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큰 실수도 했단다. -「흰콩 검정콩」
위의 시에서 검정콩과 흰콩은 양극단의 상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손자와의 대화체로 쓰여진 이 시는 선생의 시가 중기에서 후기로 이르면서 보다 많이 원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를 통해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대화임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대화를 통해 우리는 오해를 풀 수도 있고, 상대의 맘을 더욱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자기의 뜻도 상대방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대화가 필요하고 시에서 이를 도입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아무튼, 위의 시는 대화이면서도 선생이 꼭 옳다고 믿는 또는, 앞에서 언급했던 제 방식대로의 삶에서 한 걸은 더 나아가 열린 공간 속으로 존재의 비밀을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보다 솔직한 모습은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알 수 있게 하고, 그 부끄러움마저 사랑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될 때, 자기 사랑과 타인 사랑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한 예라 하겠다. 다시 선생의 인간애 문제로 들어가기 위해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오곡(烏鵠) 7백리를/ 수 없는 가슴들이 허물어져 간/ 억년 세월이 여기 흐르고 있다// 골골이/ 뻐꾹새 유난스리/ 춘궁을 울어 주었고// 6.25의 피소답을 빤/ 아낙네들의 사연을 노질한/ 赤布 뱃사공// 어느 물굽이에/ 영산홍 요요히/ 강촌 아침 인사에/ 토장내가 나는/ 빈한한 풍속이/ 연기에 그을린 등피// 오늘도 나는 강 언덕에 서서/ 신라의 후예들이/ 쌓올리고 쌓올린 가슴벽들이/ 유수에 허물어져 가는 소릴 듣는다. -「낙동강」
위의 시는 단순한 연민이 아닌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역사의식 속에서 윤리의식 내지는 ‘義’로서 시정신을 세웠건 것을 일깨워준다. 정의와 자유, 그리고 행복을 구가하면서 제4시집에서 아기의 평화를 언급했듯이 이제, 역사 속에서 선생은 고향을 따라 흐르는 낙동강의 물길, 그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굽어보면서, 한국적 풍속과 아울러 오늘의 시점에 선 자신을 회고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음을 보여주는 시이자, 애환이 남긴 역사를 말해준다. 나아가, 전기에 언급했던 구걸에 대한 시「교상구걸」. 그리고,「패잔병」과「횡사」,「인간을 보호합시다」와 같은 시들 속에서 연민의 정과 인간애를 느끼게 한다.
할아버지 눈쌈해요/ 진 사람이 말이야/ 이긴 사람 태우고/ 방 한 바퀴 돌기해요/ 하나 둘 셋!/ 다시 해요 다시 해요/ 하나 둘 셋!/ 다시 해요 다시 해요/ 하나 둘 셋!/ 이겼다 이겼다/ 할아버지 약오르지/ 이렇게 이렇게 엎드려요/ 점잖게 출발해요/ 딸랑딸랑 길 비켜라/ 백설공주 만나러/ 왕자님 나가신다. -「눈싸움」
위의 시 역시 대화체로 되어 있다. 그리고, 자기 방식대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동심의 이기적인 행동을 오히려 상관치 않고 따스한 눈길로 보고 있다. 그것은 선생이 이미 달관의 경지에 입문하였기 때문이다. 아울러「거북이 반대」에서 볼 수 있듯이 철저하게 선생은 바보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선생은 정작 바보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집착에서 벗어난 여유를 말해주는 것이며, 허무를 딛고 일어선 또 하나의 성숙된 세계를 펼쳐 보여주는 면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 시집의 말미에 언급된 평론에서도 말해주듯 “남의 말을 부담 없이 들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곧, “귀가 순해졌다”는 “이순(耳順)”의 진정한 의미이기도 하다.
이처럼, 선생의 후기작품세계는 우리 현대시를 보다 성숙시켜 좋은 詩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황우」에서「탱자나무꽃」,「주춧돌」로 이어지면서 시의 정신을 세워 확고히 하여 시를 점검하였고, 「노루아지」를 통해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면서 시의 모습을 보다 성숙시켰다. 그 예로 ‘황우’를 ‘노루아지’로 변모시킬 줄 아는 지천명의 뜻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며, 후기의「잡초 속의 해인사 양귀비꽃」에서 달관의 경지에 입문한 듯이 시의 완결미를 구체적인 시에서 성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지칠 줄 모르는 시작에 대한 열정은 이순(耳順)이 넘어서도 끄질 줄 모르고 있음은 연민의 세계를 딛고, 허무를 넘어서 끊임없는 인간애와 역사의식 속에서 꿈틀거리는 시혼(詩魂)을 달궈왔으며, 그 불이 아직도 활활 타오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문학의 표현양식으로는 시적 성취를 위한 언어의 압축과 직관에 의한 응시를 통해서 사물의 진정한 모습을 솔직하고도 진지하게 드러내 보여주었으며, 사물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으로 상상력을 유발케 하는 확장의 언어로 변모시켜 언어의 격(格)을 높였으며, 경상도 특유의 언어구사는 정감 있는 어휘로 독자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케 하였고, 대화체의 운용은 실감 있는 현장성을 살려 살아 있는 시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특히, 선생의 박애정신을 바탕으로 한 생활철학은 앞서 살펴본 선생의 생애에서 이미 찾아보았듯이 실천적인 행동으로 옮겼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시의 행간에서 느낄 수 있는 연민의 정과 인간애의 깊은 심연에 빠져들게 한다. 특히, 삶의 비극성을 비극으로서 끝나지 않고,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비극미(悲劇美)의 진수를 보여 있으며, 소박하고 소탈한 성격과 올바른 양심에서 건져 올린 작품들은 시의 건강미(健康美)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표범의 울음소리로 연상되어지는 황우의 울음소리와 같이 진폭이 큰 언어와 성감(性感)을 유발케 하는 어휘의 선택은 시의 격을 높여 역사의식 또는 짙은 황토색과 아울러 시의 기상을 웅혼(雄渾)하게 느끼게 하고, 직관을 통한 솔직한 표현과 정감 있는 언어로 요리한 시에서는 삶의 진솔하고 아기자기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동심을 바탕으로 한 대화체에서는 달관(達觀)의 여유 즉, 여백의 미(美)내지는 인간 섭리(攝理)의 묘미를 유감 없이 발휘했다고 보겠다.
이제까지 선생의 후기 시들을 개략적이나마 살펴보았다. 그 달관의 경지가 무엇인지 어슴푸레 이해할 것 같으나, 좁은 식견으로서 좀더 사유를 확장하고, 상상의 날개를 펼쳐 더 넓은 세계를 접한 후에 무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기에 부족하지만, 이쯤에서 선생의 시를 탐구하는 작업을 마무리짓기로 한다.
4. 황우 이준범 선생의 시와 오늘의 좌표
이제, 선생이 남긴 성과를 바탕으로 선생의 시정신(詩精神)과 시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취해야 할 시적 좌표가 무엇인지를 앞서 제기했던 문제와 연결하여 점검해야 할 때가 되었다. 제기했던 문제를 다시금 반추해보면, 시의 가락(리듬)과 이미지, 전통시에 대한 신감각(新感覺)에 따른 지역의 자연과 생활환경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그 영역을 설정했었다.
먼저, 가락에 대해서는 그 대표적인 예가 선생의 시「보리타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성숙의 가을」또는「노루아지」에서 보여주는 경상도 특유의 음색과 가락은 한국적 토속 음을 들려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는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민요에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의 민요 속에는 서민의 정서가 그대로 우려져 있어 우리 맘속으로 흐르는 율(律)의 원류로 보다 잘 받아들여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바, 이를 보다 성숙시켜 우리의 가락으로 만들어 가는데 한시도 잊어서는 안될 중요한 시적(詩的) 자산(資産)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 말부터 단가(短歌)로 시의 압축에 의한 진수를 이미 일구어낸 우리는 이를 현대시조와 함께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왔음은 익히 아는 사실이나, 장가(長歌)에 대한 가사(歌詞) 문학은 낡은 표현법으로 취급하기 쉬운 일면이 있기에 이를 보다 계승․변모시켜 우리의 소리로 승화시켜 높은 시의 단계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면, 세계 속의 문학으로서 자리를 확고히 하여 그 빛을 잃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한 진흥책으로는 전통계승의 입장에서 옛 “시조창(時調唱)”이나 “창가(唱歌)”와 같이 그것들을 활성화하는 방법이 되겠다고 여겨진다.
둘째, 이미지에 대한 대표적인 예를 찾아보면「금이 간 황우」나 「태양을 찾아가는 소년」, 「침묵의 말씀」이라는 시가 그것들이다. 이미지는 하나가 아니라 중첩적(重疊的)으로 이루어질 때 복잡한 내면의 심연을 잘 드러내 보다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으며, 확장된 이미지의 군(群)들로 하여금 시의 다의성(多義性)을 통해 높은 수준의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물의 진면목(眞面目)을 잘 보여줄 수 있다. 이는 묘사와 비유, 상징으로 연결되면서 기교가 아닌 언어의 적합성, 표현의 적절성을 차용한 시의 완결미(完結美)를 성취시킬 수 있다. 그래서, 선생은 기교를 염두에 두지 않았으나, 사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통해,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통해서 응축된 언어를 길어 올렸으며, 기교가 아닌 삶에서 자연스럽게 이미지의 선명성을 보여주는 시를 창작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은 시인의 심성을 보다 고양시켜 맑고 정감 있는 방향으로 갈고 닦는다면, 오늘의 시인들에게도 시를 창작하는 필요한 시적 기교의 문제를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시인의 심성과 기질문제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셋째, 지역의 자연과 생활환경, 이와 관련된 신감각의 문제는 선생이 몸소 실천했던 고향사랑과 후배사랑과도 무관하지 않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자기 지역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이는 자기 사랑에서 출발하여 이웃사랑, 나라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이며, 자기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곧 이웃 어른을 섬기는 일이며, 이웃 어른을 섬길 줄 알아야 나라에 충성할 수 있다는 지극히 단순하고도 꼭 필요한 윤리와 도리에서 기인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나아가, 시인이 성장함에 따라 사회의 제문제(諸問題)를 직시하고, 그것을 풀어내고 향상시켜, 복된 삶을 영위케 하는 원동력으로 삼는다면,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요소임을 선생의 시를 통해 느낄 수 있었던 점이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시를 살펴보면,「귀뚜라미」,「허수아비」,「흰콩 검정콩」,「낙동강」,「눈싸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동심의 입장에 서서 대화체를 운용한「눈싸움」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문제를 풀어 가는데 새로운 방향에서 문제의 핵심에 가 닿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글을 시작하면서 언급했던「쓰라라미」나「허수아비」의 시에서는 어떤 현상에 대한 투시(透視)와 응시(凝視), 통찰력(洞察力)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감각의 발동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선생의 시에서 우리가 정해야 할 좌표까지 점검해 보았다. 여기서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면, 시인은 시인의 시를 깊이 읽어야 하고, 지역의 시인은 지역의 시인을 아끼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연후에 문학의 교류를 통해서 지역문학의 지평을 넓혀가고, 지역 시인과 지역 민들이 함께 하는 자리를 자주 만들어, 시민과 더불어 대화하고 함께 문학을 나누면서, 지역의 문화와 예술 나아가 문화를 풍요롭게 하여야, 그 지역의 문화가 살고 그 지역의 특산물이 살고 그 지역의 기술이 향상되어, 그 지역의 경제발전과 그 지역의 행복을 성취할 수 있음에 주목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5. 글을 마치면서
문학은 예술이기 이전에 학문이며, 학문 중에서도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영역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공기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듯이 쉽게 잊어버리고 사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삶의 여유를 상실하고, 생활의 질서가 파괴되고, 사회가 어수선해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이를수록 우리는 문학을 아끼고 질적으로 향상시켜 이 사회를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지렛대로서 그 몫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시인의 본분(本分)이자, 사회적 책무(責務) 내지는 국가적인 자산(資産)이라고 하겠다.
가족의 화목을 도모하고, 친구간에 우의를 돈독히 하며, 어른에 대한 존경심을 일깨워 그 지역과 사회가 건강하도록 하는 데는 문학의 힘이 크다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한 보탬이 될 수 있는 문학의 가치와 효용성을 증대시키는 일에 문학인은 게을리 할 수 없다. 나아가,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도 감동과 즐거움을 주어 기쁨의 생활이 되도록 다 함께 노력하여 국민 모두가 문학을 아끼고, 사랑하는 날이 온다면 한강 물도 덩실덩실 춤을 출 것이고, 낙동강도 기쁨에 차서 유유히 흘러갈 것이며, 섬진강도 손짓하며 한 형제애를 싣고 남해 넓은 태평양에서 우리의 무궁화 꽃이 활짝 필 것이다.
아침해를 머금은 찬란한 무궁화여 이슬방울이 맺혀 빛나는 꽃이여, 동해물이 푸르고, 백두산이 높다해도 문학의 얼은 우리들 가슴마다 청춘의 봄을 맞이하여 이 땅에 열정적인 삶과 마르지 않을 샘물이 되어 끝없이 솟아나리라 확신하면서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 참고문헌
․이준범,『黃牛』 新興出版社, 1961. 1. 20.
․이준범,『탱자나무꽃』新興出版社, 1963. 12. 10.
․이준범,『주춧돌』新興出版社, 1967. 6. 10.
․이준범,『노루아지』三安出版社, 1979. 11. 20.
․이준범,『잡초 속의 해인사 양귀비꽃』三安出版社, 1882. 10. 20.
․경남문인협회「제2회 경남문학제」경남문학관 행사 자료집, 2009. 3. 28,
․창녕일보사,「창녕일보」제764호 특집 추모사 외, 2004. 2. 10.
․중앙일보사,「중앙일보」사람사람, 2005.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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