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荒蕪地)
쿠메의 한 무녀(巫女)가 독 안에 매달려 있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그 때 아이들이 "무녀, 당신은 무엇이 소원이오?"라고 묻자, 그녀는 "난 죽고 싶다."라고 대답했다. - 한층 훌륭한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1. 주검의 매장(埋葬)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정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차라리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했었다.
망각의 눈[雪]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으니.
여름은 소낙비를 몰로 슈타른베르가제를 건너와
우리를 놀라게 했다. 우리는 주랑(柱廊)에 머물렀다가,
해가 나자 공원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한 시간 가량 지껄였다.
내가 러시아 사람이라고요. 천만에 나는 리투아니아 출신이지만 순수한 독일인이에요.
어렸을 때, 종형(從兄) 태공(太公) 댁에 유숙했었는데
종형은 나를 썰매에 태워 데리고 나간 일이 있었죠.
난 무서웠어요. 마리, 마리,
꼭 붙들어, 라고 그는 말했어요. 그리고 미끄러져 내려갔지요.
산에서는 마음이 편하지요.
밤에는 대개 책을 읽고, 겨울에는 남쪽으로 갑니다.
이 엉켜 붙은 뿌리들은 무엇인가? 돌더미 쓰레기 속에서
무슨 가지가 자란단 말인가? 인간의 아들이여,
너희들은 말할 수 없고, 추측할 수도 없어, 다만
깨진 영상의 무더기만을 아느니라, 거기에 태양이 내리쬐고
죽은 나무 밑엔 그늘이 없고, 귀뚜라미의 위안도 없고
메마른 돌 틈엔 물소리 하나 없다. 다만
이 붉은 바위 밑에만 그늘이 있을 뿐,
(이 붉은 바위 그늘 밑으로 들어오라),
그러면 네 너에게 보여 주마,
아침에 네 뒤를 성큼성큼 따르던 너의 그림자도 아니고,
저녁 때에 네 앞에 솟아서 너를 맞이하는 그 그림자와도 다른 것을,
한 줌 흙 속의 공포(恐怖)를 보여 주마.
바람은 가볍게
고국으로 부는데
아일랜드의 우리 님
그대 어디서 머뭇거리느뇨
"일년 전 당신은 나에게 히야신스를 주셨지.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히야신스 소녀라고 불렀답니다."
― 그러나 그 때 당신이 꽃을 한 아름 안고 이슬에 젖은 머리로
밤 늦게 히야신스 정원에서 나와 함께 돌아왔을 때,
나는 말이 안 나왔고 눈도 보이지 않았고, 나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몰랐었다.
다만 빛의 한복판, 그 정적을 들여다 보았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바다는 황량하고 님은 없네. <후략>
요점 정리
작자 : 엘리엇(T. S. Eliot )/ 이창배 옮김
갈래 : 자유시. 장시(長詩)
율격 : 내재율
성격 : 주지적. 문명 비판적. 상징적]
심상 : 시각적
제재 : 고대의 성배(聖杯) 전설
주제 : 현대 문명의 비인간성
구성 : 전체 5부
전편 433행으로
1부 〈죽은 자의 매장 The Burial of the Dead〉,
2부 〈체스 게임 A Game of Chess〉,
3부 〈불의 설교 The Fire Sermon〉,
4부 〈의사 Death by Water〉,
5부 〈우뢰가 말한 것 What the Thunder Said〉
(여기에 실은 것은 제 1부의 앞부분 두 연이다.)
특징 : 단편들이 동시에 병치되어 있고, 일종의 독백 형식을 갖춘 시로 상징적, 비유적, 신화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정신적 혼미와 황폐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의식의 흐름'의 방법이 쓰였으며, 〈성서〉·〈우파니샤드〉를 비롯해 단테·보들레르·셰익스피어 등의 작품이 곳곳에 인용되어 있다. 이 시의 구성은 J. 웨스턴의 저서 〈제식에서 로맨스로 From Ritual to Romance〉 중의 성배전설과 J. G.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The Golden Bough〉를 기초로 하고 있다.
의의 : J. 조이스의 〈율리시스 Ulysses〉(1922)와 함께 영국 현대문학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출전 : <황무지>(1922)
내용 연구
에즈라 파운드 : 미국의 이미지즘 문학 운동을 선도한 시인. 엘리엇 등 많은 현대 시인에게 영향을 끼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이 구절은 초서의 '켄터버리의 이야기(The Canterbury Tale)'의 '희망적인 4월'의 부정이다. 이 부정의 의미는 시인 자신의 개인적인 불행에 따른 심정의 고백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그러한 시인의 의식이 다름아닌 코메의 무녀나,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에 있는 어부왕의 심정과 일치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생명의 부활을 약속받은 이 찬란한 봄의 계절에, 죽은 목숨만을 이어가고 있으니 그것은 잔인한 운명일 수밖에 없다. 가사(假死) 상태를 원하는 현대의 주민들에게는 모든 것을 일깨우는 사월이 가장 '잔인한' 달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역설적인 표현은 '저주받은 축복'이기도 하다. 봄에는 만물이 소생하므로 '축복'의 계절이지만, 작고 연약한 씨앗이 겨울의 단단한 땅을 밟고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점에서 보면 '저주'이기도 하다. 시인 엘리엇은 20세기 서구 문명의 황폐화를 겨울의 황무지에 비유한 다음, 이러한 황무지에 희망의 씨앗을 싹트게 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껍질을 뚫고 나오려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봄비로 - 뒤흔든다 : 4월이 되어 봄비에 잠든 생명의 뿌리가 뒤흔들리는 것을 본 시인에게는 좀더 행복했던, 열정적으로 삶을 살았던 과거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슈타른베르가제 : 뮌헨 근처에 있는 호수 이름.
이 엉켜 붙은 - 자란단 말인가 : 여기에서 행복한 꿈에서 깨어나듯이 시인의 의식은 일변하여 현대의 황무지로 초점이 바뀐다.
인간의 아들이여, / 너희들은 말할 수 없고, 추측할 수도 없어, : 구약 성서의 "에스겔" 2장 1절을 인용하고 있다.
깨진 영상의 무더기만을 아느니라. : "에스겔" 6장 6절, '너의 영상(우상)들이 깨어져 없어지며'를 인용하고 있다.
거기에 태양이 - 물소리 하나 없다 : 어느 황야의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시인의 사상에 대한 객관적 상관물일 뿐, 어느 특정한 지역이 아니다.
이 붉은 바위 밑에만 그늘이 있을 뿐, : 구약의 "이사야" 32장 2절, '(외로운 왕은) 광풍이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곳 같은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은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를 인용한 표현으로 바위 그늘은 예수를 암시한 것으로 풀이되고, 그 곳이 인간의 유일한 피난처라고 묘사하고 있다.
한 줌 - 보여 주마 : 여기에 이르러 시인의 명상은 사랑의 장면으로 옮겨진다. 시인은 예언자의 입장에서, 공포의 대상인 죽음이 영원한 생명으로 돌아가는 죽음이기 때문에 이 지상의 생명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지상의 생명은 결국 실체없는 허망한 것이어서, 아침 저녁 우리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의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바람은 어디서 머뭇거리느뇨 : 이 4 행의 인용은 바그너의 가곡 '트리스탄과 이졸트' 중 아일랜드의 처녀 이졸트를 콘월에게 데리고 오는 선상에서 젊은 수부가 행복에 겨워 부르는 노래의 일부분이다. 트리스탄의 이야기는 아더왕의 전설 중의 한 이야기다.
바다는 황량한 님은 없네. : 이 구절 역시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트" 3막 24절을 인용한 것으로 제 3막에서 트리스탄이 이졸트를 기다리며 임종하는 마당에 배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양치기의 말이다. 이제 시인은 황홀한 사랑의 이상에 찬물을 끼얹듯이, 앞서의 인용에서 꿈 같은 사랑의 장면을 연상했던 독자들에게 이 절망적인 노래 소리를 대조시켜, 황무지의 현실로 되돌아 오게 한다. 기지에 넘치는 갑작스런 병치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이해와 감상
작가가 이 작품을 발표한 의도는 전후 서구의 황폐한 정신적 상황을 조망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작가는 고대의 성배 전설(聖杯傳說)과 웨스턴 여사, 프레이저가 연구한 생명의 원리와 그 부활에 관한 원형 신화(原型神話)를 참조하였다. 엘리엇은 이 원형 신화에서 빌려온 상징을 20세기의 인류 문명의 황폐상과 같은 차원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시인은 자신의 개인적 고뇌를 보편적 의미로 확산하여 시를 비개인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첫 행의 암시적 시구에 제시되듯이, 삶이 곧 죽음이 되는 역설적 상황을 통해 작가는 구원의 미래를 예견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의 시체에서 어떤 문명의 싹이 트고 꽃을 피울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과거의 전통을 지켜보고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 속에 스며들어 있는 그 전통적 정신의 유산을 발견해 내려는 관찰력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작가는 현대문명의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구인환 김흥규 저 한샘문학교과서)
감상2
'황무지'는 정신적 메마름, 인간의 일상적 행위에 가치를 주는 믿음의 부재(不在), 생산이 없는 성(性), 그리고 재생(再生)이 거부된 죽음에 대해 쓴 시이다. 엘리엇은 이 시에서 전후 서구의 황폐한 정신적 상황을 '황무지'로 형상화해 표현하고 있다.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표현되고 있다. 진정한 재생을 가져오지 않고 공허한 추억으로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4월은 재생을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재생을 요구함으로써 또한 잔인하다.
전체의 내용을 통해 보면 결국 이 시는 '성배 전설'이라는 원형 상징을 이용해 20세기 인류 문명의 황폐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과거의 전통과 현대의 접목으로 구원의 미래를 예견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시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감상3
제1부 '주검의 매장(埋葬)'의 표제는 식물신들의 모상을 매장함으로써 재생을 기원했던 고대인의 풍요의 제식(祭式)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영국 성공회의 매장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이 부분에서 엘리엇이 주로 관심을 두는 것은 죽음과 재생의 주제에 대한 집약적인 표현이다. 이 시의 에피그라프에 나오는 쿠메의 무녀는 그리스 신화의 예언가를 말한다. 그녀는 아이네스를 지옥에서 빠져 나오게 해 준 대가로 아폴로에게 불사(不死)의 특권을 얻었지만 어리석게도 영원한 젊음을 요구하는 것을 깜빡 잊어버렸다. 그 결과 그녀는 늙어서 몸이 오그라들어 작은 항아리 속에 넣어져 세인(世人)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봄인 4월은 희망과 재생의 계절인데도, 황무지의 주민들은 겨울의 평화로운 죽음과 망각의 잠을 더 좋아하고, 부활을 위한 꿈틀거림을 오히려 귀찮고 잔인하다고 생각한다(1연). 이 첫 연은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의 첫 연과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삭막한 봄의 풍경을 본 시인에게는 좀더 행복하게 살았던 과거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다(2연). 이 기억은 시인이 1914년 논문 준비를 위하여 간 독일에게 겪은 경험에 관한 것이다. 슈타른베르가제는 뮌헨 근처에 있는 호수 이름이고, 시는 시인이 그 곳에서 만난 리투아니아 출신의 여인이 일방적으로 자기의 어렸을 때의 얘기를 하는 형식으로 씌어 있다. 여인의 어린 시절이나, 그 여인을 만났던 시인의 기억이나 모두가 행복한 과거의 경험이다.
2연 후반부의 평화로운 분위기로부터 시인의 의식은 갑자기 현대의 황무지로 초점이 바뀐다(3연). 이하 7행에 걸쳐 황야의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거기엔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물도 없다. 그리고 거기에 사는 인간이란 것도 인간의 형체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말도 못 하고 생각도 없다. '인간의 아들'이란 성서("에스겔" 2장 1절 '인간의 아들아 너의 발로 일어서라. 그러면 나는 네게 말하리라.')에 나오는 말로 시인은 이 말을 인용함으로써 위와 같은 절망적 상황에 빠져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했던 고난을 현대인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시인은 이 고난에서 벗어나 생명의 길을 찾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붉은 바위'는 구세주 또는 성배(聖杯)를 암시하는 것이며, 그 곳이 인간의 유일한 피난처라고 묘사하고 있다. 황무지의 고난을 피하여 그리스도를 찾는 길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다. '한 줌 흙 속의 공포를 보여 주마.'라는 말은 이 지상의 생명은 결국 실체 없는 허망한 것이라는 뜻으로, 시인은 그것을 아침 저녁으로 우리를 따라 다니는 그림자의 이미지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이후의 행에서 시인의 명상은 사랑의 장면으로 옮겨 간다. '바람은 - 머뭇거리뇨.'는 바그너의 가곡 "트리스탄과 이졸트"에 나오는 말로 아일랜드의 이졸트를 영국 서남쪽 콘월의 마크 왕(王)에게 싣고 오는 배의 선원이 남겨 두고 온 자기 애인을 생각하며 부르는 노래이다. 여기에서 시인은 행복하고 순수한 사랑의 노래로 히야신스 동산의 사랑 장면을 제시하고, 그 황홀한 사랑이 생의 절정의 순간임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시인은 그러한 황홀한 사랑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듯이 '바다는 황량하고 님은 없네.'라는 절망적인 노래 소리를 대조시키고 있다. 앞의 인용은 돌연히 그 꿈이 깨어지고 황무지의 현실이 되돌아오는 절망적인 느낌을 준다. 기지에 넘치는 갑작스런 병치의 효과라 할 것이다. '바다는 - 없네.'의 구절도 "트리스탄과 이졸트"에서 인용한 부분이다. 트리스탄은 이졸트와 간통했다고 붙잡혀 중상을 입고서, 이졸트가 와서 그를 치료해 주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이졸트의 배가 오는지 망을 보던 목동은 '바다는 쓸쓸하고 말이 없네.'라며 서글프게 말한다.
심화 자료
"성배(聖杯) 전설"에 대하여
늙고 병든 왕이 통치하는 나라에 재앙이 일어난다. 왕은 재앙을 물리칠 지혜롭고 힘센 젊은이를 찾고 있다. 성배 전설은 성배를 얻은 자가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전설이다. 마침내 성배를 가지고 한 젊은이가 나타나 재앙(전염병 혹은 외적인 침입)을 물리치고는, 공주와 결혼하여 새 나라를 만든다. 엘리엇은 현대 사회의 재앙을 '황무지'에 비유한 다음,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듯 새로운 구세주가 나타나기를 기원하고 있다.
'황무지(荒蕪地)'의 의미
황무지는 제 1차 세계대전(1914-1918) 직후의 세계와 작자 자신의 황폐한 사생활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황무지란 전쟁의 황폐와 유혈의 황무지라기보다는 서구인의 정신적 불모 상태, 즉 어떤 소생의 믿음도 인간의 일상생활에 중요함과 가치를 제공해 주지 못하고, 성(性)이 2세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한갓 쾌락을 위한 것이 되었고,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도 없는 비극적 상태를 나타낸다.
엘리엇의 문학관
20세기의 모더니즘 문학론의 선구가 된 엘리엇은 서구의 현대 문명 위기를 극복하는 문학적 방법을 고전적 규범의 현대화에서 찾았다. 즉 전통과 개인적 재능을 조화시킴으로써 보편적 이념과 정서를 시에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관은 인간의 이성과 지적인 현실을 강조하는 입장으로서, 모더니즘 문예 사조가 사실주의의 실증적·합리적·물질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개인의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근대주의' 또는 '현대주의'로 번역할 수 있는 모더니즘은 인상주의, 야수파, 미래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을 모두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사조이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세계의 객관적 인식과 지적 형상화를 목표로 하는 보수적 방법론의 의미를 가진다.
황무지(荒蕪地)의 창작 배경
엘리엇이 '황무지'의 집필 시작한 1921년경은 그의 일생 중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가장 괴로웠던, 시인의 고뇌가 절정에 도달했을 때 쓰여진 시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러한 개인적 고뇌는 황무지에서 다음 세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엘리엇의 종교적 추구의 자세이다. 두 번째로 아내 비비엔의 정신 이상, 가정의 우환, 바쁜 사생활 등 시인의 불행했던 생활 속에서 사사로운 추억과 감회를 기억하고 싶은 시인의 갈망이다. 세 번째로 이 시에서 제 1차 세계 대전 직후의 유럽 문화의 붕괴상에 대한 시인의 불평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병치(竝置 : parallelism)
병렬(竝列)이라고도 하는데, 비슷한 구조의 문장이나 비슷한 지향을 보이는 의미를 나란히 늘어놓는 방법을 가리킨다. 대부분 비슷한 구조를 가진 단어나 구절을 늘어놓는 형식이 일반적인데, 민요에서 흔히 발견될 정도로 시행 구성의 기본이 된다. 그러나 현대시에서는 이러한 문장 수준의 병치를 넘어서서 서로 다른 이미지끼리 나란히 놓음으로써 신선감을 주는 효과를 거두기도 한다.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1888. 9. 26 미국 미주리 세인트루이스~1965. 1. 4 런던.
미국 태생 영국의 시인·극작가·문학비평가로 〈황무지 The Waste Land〉(1922) 같은 시와 〈성당의 살인 Murder in the Cathedral〉(1935)·〈칵테일 파티 The Cocktail Party〉(1950) 등의 희곡을 통해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했다. 성공적인 뮤지컬 〈캣츠 Cats〉는 〈늙은 주머니쥐의 고양이에 관한 책 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1939)을 기초로 한 극으로, 1981년 영국에서 막을 올렸고 1982년 뉴욕에서 상연되었다.
시인·극작가·문학평론가·편집인으로서 엘리엇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20세기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시어·문체·운율 등의 실험으로 영시(英詩)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일련의 평론들을 통해 과거의 정통적 견해들을 타파하고 새로운 주장을 내세웠다. 또한 사회적·문화적 제반 문제들에 대해서도 의견을 피력했으며, 페이버앤드페이버출판사의 이사로서 젊은 시인들을 관대하면서도 분별력있게 도와주던 후원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 발표된 〈4개의 4중주 Four Quartets〉로 당시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영국의 시인이자 문학가로 인정받아 1948년 메리트 훈장과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가정 배경과 초기생애
엘리엇의 첫 미국 조상은 앤드루 엘리엇으로 그는 영국 서머싯 이스트코커의 구두제조공이었으며, 1670년 보스턴으로 이주했다. 할아버지인 윌리엄 그린리프 엘리엇 목사는 1834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한 뒤, 즉시 보스턴에서 세인트루이스로 이주했다. 그는 열렬한 연방주의자·유니테리언교도였으며 노예제도가 허용된 주에서 활동했던 반노예주의자로서, 워싱턴대학교를 창설했으며 그가 반대하지만 않았다면 그 대학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을 것이다. 1872년 그는 워싱턴대학교의 총장이 되었다. 아버지인 헨리 웨어 엘리엇은 가문의 전통을 깨고 사업을 했다. 어머니인 샬럿 챔프 스턴스는 어느 정도 이름이 났던 다작(多作) 시인으로서 시아버지의 전기를 썼다. 또한 15세기 이탈리아의 종교개혁자인 사보나롤라의 순교를 소재로 한 시극을 짓기도 했는데, 1926년 그녀의 아들이 이 시극에 서문을 붙였다. 엘리엇이 태어날 무렵, 그 가문은 54년 동안이나 미주리 주에만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남부나 서부의 영향을 배제하고 뉴잉글랜드의 정치적·신학적 문화를 보존하고 있었다. 엘리엇은 말년에 자신이 보스턴이나 뉴욕·런던에서 태어나지 않고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뉴잉글랜드인이었다.
엘리엇의 가정 배경은 시인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실무적'이 되거나 사업에 투신하지 않은 채 당시 가능했던 가장 광범위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세인트루이스의 스미스 아카데미를 다닌 후 매사추세츠 주의 대학 예비학교인 밀턴 아카데미를 다녔고, 그곳을 졸업한 뒤 1906년 하버드대학교에 입학했다. 보통 대학 수학 기간이 4년이었지만 그는 3년 만에 문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하버드대학교 재학 당시 그에게 깊은 감화를 준 사람은 철학가이자 시인인 조지 산타야나와 비평가인 어빙 배빗이었다. 그는 배빗으로부터 반낭만주의적 태도를 흡수했는데, 훗날 영국 철학자들인 F. H. 브래들리와 T. E. 흄의 사상을 전공함으로써 반낭만주의적 태도가 더욱 심화되어 그의 일생 동안 지속되었다. 1909~10년에 그는 하버드대학교 철학과 조교를 지냈다.
1910~11년은 20세기 초반의 위대한 시인인 엘리엇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해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그 해를 보내면서 소르본대학교에서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 강의를 들었고, 알랭 푸르니에와 함께 시를 읽었는데, 그의 '가르침'으로 프랑스어를 완전히 익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샤를 보들레르에서 쥘 라포르그를 거쳐 스테판 말라르메에 이르는 상징주의 시에도 정통하게 되었다. 1914년 처음으로 에즈라 파운드를 만났다. 1946년 〈포이트리 Poetry:A Magazine of Verse〉에 그의 정치성을 무시한 채 파운드의 문학 경력을 옹호하는 글을 기고했는데, 그 글에서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10년 동안 젊은 미국 시인들이 처했던 무미건조한 문학적 환경을 묘사했다. 엘리엇과 파운드는 모두 외국 시인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파운드는 투르바두르(중세 남프랑스의 음유시인)와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시인들을, 엘리엇은 라포르그와 단테를 사숙(私淑)했는데, 이들은 엘리엇이 자신의 문체를 발견하는 데 있어서 존 웹스터와 존 던 이상으로 영향을 주었다. 1911~14년 그는 하버드대학교로 돌아와 인도철학을 전공하고, 탁월한 학자인 찰스 랜먼으로부터 산스크리트를 배웠다. 1913년 그는 브래들리의 〈현상과 실재 Appearance and Reality〉를 접하게 되었고, 1916년 유럽에서 〈F. H. 브래들리의 철학 지식과 체험 Knowledge and Experience in the Philosophy of F.H.Bradley〉이라는 표제의 논문을 완성했다. 이 논문은 1964년에야 비로소 출판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박사학위 취득에 필요한 최종 구두시험을 치르기 위해 하버드대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초기의 출판물
엘리엇은 편집인, 극작가, 문학비평가, 철학적 시인이라는 4가지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아마도 당시 영어권 시인들 중 가장 해박한 시인이었을 것이다. 대학 재학시절에 쓴 그의 시들은 '문학적'이고 관습적이었다. 그의 최초의 중요한 출판물이며 영어로 씌어진 '모더니즘'의 첫 걸작은 〈J.앨프레드 프러프록의 연가 The Love Song of J.Alfred Prufrock〉였다. "자 우리는 가세, 그대와 나,/저녁은 마취되어 수술대 위에 있는 환자처럼/하늘에 몸을 뻗어 누워 있는 이때……" 엘리엇은 이 시의 복사본을 그의 친구인 콘래드 에이컨에게 주었고, 그는 이 시를 에즈라 파운드에게 전했으며, 파운드는 다시 이 시를 〈포이트리〉지의 편집장인 헤리엇 먼로에게 보냈다. 먼로가 그것이 시의 장르에 속한다는 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1년 이상이나 발표가 늦어지게 되었다. 비록 파운드가 1908년에 개인적으로 소책자 〈A lume spento〉를 이미 출간했었지만, 〈J. 앨프레드 프러프록의 연가〉는 이 문학적 개혁가들이 실험 단계를 넘어 완성한 첫 시였다. 이 시는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와 윌리엄 워즈워스의 〈서정 민요집 Lyrical Ballads〉(1798)과 같이 과거와 철저한 단절을 이루었음을 보여주었다. 20세기 시의 혁명은 엘리엇의 첫 시집 〈프러프록 외(外) Prufrock and Other Observations〉를 출간한 1917년에 성숙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표제시 〈프러프록〉 이외에도, 이 책에는 〈서시 Prelude〉·〈어느 여인의 초상 Portrait of a Lady〉 등의 원숙한 작품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시의 혁명은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이 혁명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콜리지와 워즈워스의 낭만주의 혁명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엘리엇과 파운드는 이 18세기 시인들인 콜리지와 워즈워스처럼 시어를 개혁하면서 혁명을 시작했다. 워즈워스는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엘리엇은 교육받은 사람이 쓰는 '현학적이지도 않고 천박하지도 않은' 시어를 추구했다. 그는 스윈번에 대해 "그렇듯 탁월한 시에서 최초로 의미 없는 소리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1년 동안 그는 하이게이트 학교에서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쳤다. 1917년 그는 잠시 로이드은행의 은행원으로 근무했다. 그동안에도 그는 문학비평과 전문적인 철학분야에서 많은 평론을 썼다. 1919년 〈시집 Poems〉을 발표했는데, 무운시 형식으로 씌어진 명상적 내적 독백시 〈제론션 Gerontion〉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시는 영시 사상 유례없는 것이었다.
〈황무지〉와 비평
1922년 〈황무지〉가 출판됨으로써 엘리엇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5부로 구성된 이 시는 서유럽의 거대한 현대도시들의 20세기적 감성의 단편적인 경험을 반영한 '수사적 불연속성'의 원칙에 따라 전개되어간다. 엘리엇은 스스로를 영원한 도시가 타락하여 생긴 세속화된 도시의 시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황무지〉의 궁극적인 주제이며, 지속적인 수사학적 전환과 대조적인 문체의 병행으로 주제가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이 시는 초기의 비평가들이 예측했던 대로 훌륭했던 과거와 타락한 현재를 단순히 대조한 것이 아니며, 그보다는 도덕적 위엄과 도덕적 타락을 시간을 초월하여 동시에 인식한 것이다. 원래 800행쯤 되었던 이 시는 에즈라 파운드의 제의로 433행으로 줄었다. 〈황무지〉는 엘리엇의 가장 유명한 시이지만 가장 위대한 시는 아니다.
엘리엇은 시인비평가는 불가피하게 ' 계획적인 비평'(programmatic criticism)을 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즉 이는 역사적 학문과는 매우 다르게, 시인으로서 시인 자신의 관심사를 표현하는 비평을 말한다. 의식적으로 의도했든 아니든 이러한 종류의 비평은 시인비평가 자신의 시가 이전 세대의 비평기준이 지배적인 문학적 풍토에서 발표된 경우보다는 더 잘 이해되고 감상될 수 있는 분위기를 창출했다. 엘리엇의 첫 비평집 〈거룩한 숲 The Sacred Wood〉(1920)에 실려 있는 평론 〈전통과 개인의 재능 Tradition and Individual Talent〉은 워즈워스의 〈서문 Preface〉만큼 역사상 중요하고 역사적으로 유사한 점이 있다. 엘리엇은 " 전통은 반드시 시인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지, 과거에 씌어진 작품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다", "참신한 것이 반복하는 것보다 낫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호메로스에서 현재에 이르는 모든 유럽 문학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영어로 글을 쓰는 시인은 과거의 시대나 언어에 구애받지 않고 자료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전통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엘리엇이 〈황무지〉에서 여러 언어로 인용하고, 다른 시인의 문체를 심각하게 패러디했던 개혁적인 참신성을 독자에게 수용시킨다는 점에서 '계획적'이다. 또한 〈거룩한 숲〉의 〈햄릿과 그의 문제들 Hamlet and His Problems〉에는 엘리엇의 객관적 상관관계 이론이 설명되어 있다. "예술의 형식에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객관적 상관관계', 즉 그 독특한 감정을 나타내도록 관습적으로 정해진 한 무더기의 사물들, 상황, 일련의 사건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감각적인 체험으로 끝나는 그 외적인 사실들이 주어질 때 감정이 즉시 환기된다."
엘리엇은 그 어구를 산타야나, 미국의 화가이자 작가인 워싱턴 올스턴으로부터 차용해 자신의 일반적인 시이론에 알맞게 적용시켰다. 그것은 단어와 대상과의 대응을 중시함으로써 후기 빅토리아 시대 수사법의 모호성을 수정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거룩한 숲〉이 출판된 다음해에 처음 발표된 다른 두 평론들은 엘리엇의 비평 기준을 거의 완성시킨 것이다. 이 〈 형이상파 시인 The Metaphysical Poets〉·〈앤드루 마블 Andrew Marvell〉은 〈비평선집 1917~32 Selected Essays, 1917~1932〉(1932)에 실려 있다. 이 평론에서 그는 영시의 계급적 위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17세기 형이상파 시인들을 최상의 위치에 두고, 18, 19세기 시인들의 위상을 격하시키고 있다. 엘리엇의 2번째 유명한 어휘인 '감수성의 분열'도 이 비평문에 나와 있는데, 이 말은 존 던과 앤드루 마블 이후 영시에서 일어났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하여 창안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사상과 감정의 조화로운 일치를 상실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졌다. 이 어휘는 비난받기는 했지만 이러한 어휘가 생겨나게 된 역사적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더욱이 엘리엇과 파운드의 시는 17세기의 몇몇 시인들에게 새로운 관심을 갖게 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엘리엇 비평의 최초의 단계, 즉 계획적 단계는 〈시의 효용과 비평의 효용 The Use of Poetry and the Use of Criticism〉(1933)이라는 하버드대학교에서의 찰스 엘리엇 노턴에 대한 강연으로 마무리짓게 된다. 이보다 얼마 전에 그는 신학과 사회학으로 관심의 폭을 넓혔으며, 3권의 짧은 비평집들인 〈램버스절(節) 이후의 명상 Thoughts After Lambeth〉(1931)·〈그리스도교 사회의 사상 The Idea of a Christian Society〉(1939)·〈문화 정의론 Notes Towards the Definition of Culture〉(1948)은 그결과를 보여준다. 이러한 비평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실한 걸작인 〈단테 Dante〉(1929)와 더불어 문학의 기본영역을 신학과 철학으로 확대했다. 즉 어떤 작품이 시인지 아닌지는 문학적인 기준으로 결정해야 하지만, 위대한 시인지 아닌지는 문학적인 것보다 더욱 높은 기준으로 정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비평과 시는 너무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고 통합된 지성과 감성의 산물이므로 이들을 따로 떼어 논의하기는 어렵다. 단테에 대한 위대한 평론은 엘리엇이 영국성공회의 고교회파가 된 지 2년 후에 발표되었다(1927). 그해에 그는 또한 영국 국민으로 귀화했다. 개종한 뒤에 쓴 첫 장시는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1930)로, 그의 이전 시들과는 전혀 다른 문체로 씌어진 종교적 명상시이다. 사실상 엘리엇의 시들은 모두 그 자신이 쓴 작품들임이 분명하지만 엘리엇은 절대로 같은 주제나 형태의 시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재의 수요일〉은 아직도 시는 자율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엄격히 비종교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시절에는 호평받지 못했다. 특히 에드먼드 윌슨 같은 비평가가 그러했듯이, 개인의 환멸감을 표현한 것으로 잘못 해석되기도 했다.
후기의 작품활동과 영향
엘리엇의 걸작은 〈4개의 4중주〉이다. 이 작품은 각 〈4중주〉가 모두 완성된 시들이기는 해도 하나의 작품으로 간주된다. 1935~ 41년에 간격을 두고 출간된 이 4편의 시들은 1943년 단행본으로 발행되었다. 이 책으로 엘리엇은 1948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희곡으로는 1926년 출간되었고 1934년 초연된 〈스위니 아고니스테스 Sweeney Agonistes〉가 엘리엇의 첫 작품이며, 1958년 초연되었고 1959년 출판된 〈원로 정치가 The Elder Stateman〉가 마지막 작품인데, 그의 서정시나 명상시보다 뒤떨어진다. 세속적인 소재를 다룬 극이라도 무의식적으로 종교를 찾던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야 하며, 사실상 모든 극은 자기인식·화합·정화로 향하는 종교적 발전구조를 갖고 있다는 엘리엇의 신념 때문에, 그는 극을 다른 시형들보다 우위에 두었다. 그의 극들은 모두 그가 고안한 무운시이며, 그 의미는 그 운율적 효과와 분리되어서는 이해되지 못한다. 즉 그는 '시극'을 다시 대중무대에 올려놓은 것이다. 〈가족의 재회 The Family Reunion〉(1939)· 〈성당의 살인〉은 그리스도교적 비극들로 전자는 복수 비극이며, 후자는 교만의 죄악을 다루고 있다. 다른 극들은 희극인데, 플롯은 그리스의 극에서 가져온 것이다. 가장 성공적인 극작품으로 1949년 초연되었고 1950년 출판된 〈칵테일 파티〉를 들수 있는데 이 극의 기본적인 줄거리는 에우리피데스의 〈알케스티스 Alcestis〉이다.
엘리엇의 편집자로서의 활동은 그가 주로 관심을 쏟은 일에 대한 부수적인 것이었지만, 그가 맡았던 계간 비평지 〈크라이테리언 The Criterion〉(1922~39)은 당시 가장 탁월한 국제적인 비평지였다. 그는 페이버앤드페이버출판사의 '이사', 즉 사무직도 수행하는 편집인으로서 1920년대부터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했다. 엘리엇의 사후에 출간된 비평집 〈비평가에 대한 비평 외(外) To Criticize the Critic, and Other Writings〉(1965)에는 매우 중요한 2편의 평론이 수록되어 있다. 〈비평가에 대한 비평〉은 평론으로, 자신의 문학비평에 대한 진지하고도 겸손한 평가이다. 〈미국 문학과 미국어 American Literature and the American Language〉는 미국 영어가 독립된 언어라는 국수주의적인 통념을 다루고 있으며, 그와 같은 확신으로 영국문학과 미국문학이 하나의 문학에서 생겨난 것임을 논하고 있다. 18세기 중반이 존슨 시대라고 불리고 있듯, 20세기 전반은 아마도 역사가들에게 '엘리엇의 시대'로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새뮤얼 존슨은 신고전주의 시대의 마지막에 활동하면서 그 시대를 요약했지만, 엘리엇은 비평가 겸 시인으로서 자신의 시대를 창조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사생활을 가능한 한 표면에 드러내지 않았다. 1915년 비비언 헤이우드와 결혼했고, 1933년 이후 그녀가 정신질환에 걸리자 그들은 별거했으며, 그녀는 1947년 죽었다. 1957년 1월 그는 발레리 플레처와 재혼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녀와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 A. Tate 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트리스탄과 이졸트(Tristan and Isolde)
Tristan은 Tristram이라고도 쓰며, Isolde는 Iseult, Isolt라고도 씀. 켈트족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유명한 중세의 사랑 이야기에 나오는 2명의 주인공.
이 켈트족의 전설은 실제로 고대 픽트족(브리튼 섬 북부에 살았던 고대인)의 한 왕의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여러 가지 유사한 전설들을 파생시킨 원래의 시는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그것이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현재 남아 있는 초기 이본들을 서로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원래 시의 주요내용을 추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젊은 청년 트리스탄은 이졸데 공주의 도움을 얻어 그의 아저씨이자 콘월의 왕인 마크를 도울 목적으로 아일랜드로 모험을 떠난다. 아일랜드에 도착한 그는 그 나라를 괴롭히고 있던 거대한 용을 퇴치함으로써 임무를 성공리에 완수한다.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불운하게도 이졸데의 어머니가 자기 딸과 마크 왕을 위해 준비해놓은 사랑의 묘약을 마시고 만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불후의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 사랑은 모든 위험에도 굴하지 않고 고난을 이겨내지만 왕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만은 변치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대부분 서로 대응되는 2개의 기본 줄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마크 왕과 신하들은 두 연인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지만 두 연인은 그들을 잡으려고 꾸며놓은 함정을 빠져나온다. 그러나 결국 마크 왕은 그들의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를 찾아내어 벌을 내린다. 화형장으로 가던 트리스탄은 절벽에 있는 예배당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해 마크 왕이 나병 환자들의 무리 속에 집어넣어버린 이졸데를 구해낸다. 두 연인들은 모뢰아 숲으로 달아나 거기서 지내던 어느날 마크 왕은 이들이 칼을 칼집에서 빼내어 두 사람 사이에 놓은 채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후 곧 두 연인은 마크 왕과 화해를 하고 트리스탄은 이졸데를 마크 왕에게 돌려주고는 나라를 떠난다. 브르타뉴에 도착한 트리스탄은 '이졸데와 이름이 같고 아름답다는 이유로' 브르타뉴 왕의 딸인 '흰 손의 이졸데'와 결혼을 한다. 그러나 그는 단지 이졸데와 이름이 같다는 점에서만 그녀를 자기 아내로 여길 뿐이었다. 독이 묻은 무기에 부상을 당한 트리스탄은 원래의 이졸데에게 전갈을 보내 그녀만이 자기를 치료해줄 수 있으며 만약 자기를 치료하러올 생각이라면 타고 오는 배에 흰 돛을 달고 그렇지 않으면 검은 돛을 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비밀을 알아챈 질투심 많은 트리스탄의 아내는 옛 애인을 도울 생각으로 서둘러 오는 이졸데의 배를 보면서 트리스탄에게 배가 검은 돛을 달았다고 거짓말을 한다. 트리스탄은 얼굴을 벽을 향해 돌린 채 죽고, 너무 늦게 도착해서 연인의 목숨을 구하지 못한 이졸데도 마지막으로 트리스탄을 껴안고 죽고 만다. 이들이 죽고 나자 기적이 일어난다. 두 그루의 나무가 그들의 무덤으로부터 솟아나와 서로 가지를 뻗쳐 얽히더니 다시는 풀리지 않게 되었다.
원래의 시는 지금 남아 있지 않지만 아마도 거칠고 심지어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등장인물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로 이루어진 잔인하고 살벌한 작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2세기말에 나온 2편의 개작본에는 원본의 야만성이 일부나마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1170년경 영국 헨리 2세의 궁정에 드나들었던 것으로 보이는 노르만 출신의 영국 시인인 토머스는 원본의 거친 내용을 상당히 완화시켜 개작을 했고, 이것을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가 독일어로 옮긴 감미로운 내용의 번안 작품은 중세 독일시의 보석으로까지 여겨지게 되었다. 12세기말에는 트리스탄이 마크 왕의 궁정으로 비밀리에 이졸데를 방문하는 사건을 노래한 짤막한 시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 개작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트리스탄이 광대로 변장하는 〈미친 트리스탄 Folie Tristan〉과 트리스탄이 음유시인으로 등장하는 〈노래하는 트리스탄 Luite Tristan〉 등 두 작품이다. 13세기에 산문으로 된 아서 왕의 전설에 관한 책들이 큰 인기를 누림에 따라 트리스탄의 이야기도 방대한 산문 로망스로 등장하게 되었다. 여기서 트리스탄은 가장 고상한 품격을 지닌 기사로 묘사되고, 마크 왕은 비열한 불한당으로 등장하며, 전체 내용은 아서 왕의 전설에 접목되어 트리스탄과 아서 왕의 기사인 랑슬로 경이 서로 경쟁관계에 놓이게 된다. 전형적인 기사들의 모험담을 셀 수도 없이 잔뜩 늘어놓고 있는 이 개정본은 중세 말기에 이르러 프랑스어로 씌어진 다른 이본들을 모두 다 제치고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5세기말에 토머스 맬러리 경도 아서 왕의 전설을 바로 이 개정본을 통해서 접했고 자신의 작품인 〈아서의 죽음 Le Morte D'Arthur〉의 일부러 차용했다. 영어로 씌어진 인기 있는 로맨스로는 13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트리스트렘 경 Sir Tristrem〉인데, 이것은 일상어로 씌어진 최초의 시 중 하나이다.
19세기에 들어와 옛 시들을 발굴하면서 전설에 대한 관심이 다시 살아났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앨프레드 로드 테니슨, 앨저넌 스윈번, 매슈 아널드 등이 트리스탄을 주제로 하여 영어로 시를 쓴 작가들이었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1865 초연)는 독일의 시인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엘리엇의 몰개성 시론
엘리엇의 몰개성 시론은 그의 전통론의 또 다른 표현이다. 엘리엇은 몰개성 시론을 더욱 뚜렷이 설명하기 위해서 화학 물질과 촉매제와의 관계에 비유하여, 시인의 정신이란 결국 다양한 감정을 마음껏 구사하여 새로운 결합을 이루게 하는 '세련되고 원숙한 매개체'의 구실을 수행하는 데 불과하다고 말했다. 시인의 정신은 '무수한 감정이나 어구나 이미지를 포착하여 저장하는 그릇'에 불과한 것이니까 '시인은 개성을 표현할 것이 아니라 특수한 매개체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인은 자신의 감정을 개성있게 표출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개성을 감추고 문학적, 역사적 전통에 의거해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 몰개성 시론이다.
아직도 시를 '개인 감정의 발로'라고 생각하는 낭만주의적 문학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1917년에 엘리엇의 이 당돌하고도 모더니즘의 시관은 충격적이었고 신선한 것이었다.
엘리엇의 비평의 배경
개별적인 문학가에 대한 엘리엇의 생각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모되었지만 그의 비평적 입장의 전체적 윤곽은 변하지 않은 체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였다. 즉 1차 대전 말에 쓴 논문은 그의 후기논문과 같은 기본적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론 체계는 정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사고가 지향하는 방향에 주목해야 한다. 그의 비평체계는 근원은 미국에서 배비트와 모등이 지도한 운동으로 휴머니즘이라고 알려졌다. 이 운동은 로맨스적 사실주의적 문학 운동과 무제한의 민주주의 및 정치에서 인도주의에 반대하는 현대적 변형으로 비평에서는 고전을 기준으로 삼고 고전을 척도로 현대 문학을 측정하기를 요구한다. 엘리엇의 비평은 이 휴머니즘적 운동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낭만주의에 대한 엘리엇의 비판
이 작품을 통해 에리엇은 시인의 개성을 표현한다는 낭만주의 사상을 공격한다. 엘리엇은 하나의 인간으로서 시인에게 중요한 경험이 그의 시에는 아무런 위치를 차지하지 않을 수도 있는가 하면 그의 시에 중요한 경험이 그의 개성과 거의 또는 조금도 관련을 가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시인이 자기 자신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놀랄만 하다거나 흥미있는 것이라고 보는 생각은 잘못이라고 여겼다. 앨리엇에게 시를 창작하는 것은 낭만주의자 워즈워스가 시 창작에 있어서 중요시 여긴 감정이나 회상이 아니라 아주 많은 수의 감정들을 응축하는 것으로 보였다.
엘리엇의 전통관
전통 내지 과거와 현재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 엘리엇은 '유럽 문화의 통일성'이라는 글에서 다음가 같이 말했다. "시에 있어서 과거에 전혀 힘입지 아니한 완전한 독창성이란 것은 없다. 한 사람의 베르길리우스, 한 사람의 단테, 한 사람의 셰익스피어, 한 사람의 괴테가 탄생할 때마다 유럽시의 전체 장에 변동이 일어난다. 한 사람의 대시인이 생존하게 됨으로써 몇 가지 현상이 발생한다. 위대한 시인은 누구나 미래의 시가 만들어지는 복잡한 토대에 무엇인가 반드시 덧보태고야 만다."
엘리엇의 '전통과 개인의 재능'
1. 죽은 자의 매장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 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슈타른버거 호(湖 : 독일의 뭔헨 근처에 있는 호수) 너머로 소나기와 함께 갑자기 여름이 왔지요.
우리는 주랑(柱廊 : 기둥을 여러 개 나란히 세운 복도)에 머물렀다가
햇빛이 나자 호프가르텐 공원에 가서
커피를 들며 한 시간 동안 얘기했어요.
저는 러시아인이 아닙니다. 출생은 리투아니아이지만
진짜 독일인입니다.
어려서 사촌 태공(太公)집에 머물렀을 때
썰매를 태워 줬는데 겁이 났어요.
그는 말했죠, 마리, 마리, 꼭 잡아,
그리곤 쏜살같이 내려갔지요.
산에 오면 자유로운 느낌이 드는군요.
밤에는 대개 책을 읽고 겨울엔 남쪽에 갑니다.
이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이 자갈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 나오는가?
인자(人者 : 사람의 아들. 예수의 자칭)여, 너는 말하기는커녕 짐작도 못하리라.
네가 아는 것은 파괴된 우상더미뿐
그 곳엔 해가 쪼아대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도 없고
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고
메마른 돌엔 물소리도 없느니라.
단지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
(이 붉은 바위 그늘로 들어오너라)
그러면 너에게 아침에 네 뒤를 따르는 그림자나
저녁에 너를 맞으러 일어서는 네 그림자와는 다른
그 무엇을 보여 주리라.
한 줌의 먼지 속에서 공포를 보여 주리라.
<바람은 상쾌하게
고향으로 불어요
아일랜드의 님아
어디서 날 기다려 주나?>
일년 전 당신이 저에게 처음으로 히아신스(풍요제에서 부활한 신의 상징)를 줬지요.
다들 저를 히아신스 아가씨라 불렀어요.
- 하지만 히아신스 정원에서 밤늦게
한 아름 꽃을 안고 머리칼 젖은 너와 함께 돌아왔을 때
나는 말도 못하고 눈도 안 보여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다.
빛의 핵심인 정적을 들여다 보며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황량하고 쓸쓸합니다, 바다는.> - (출처 : 김대행 김동환 저 교학사 문학교과서)
황무지 : '황무지'란 거친 땅을 뜻한다. 그러나 이 말이 주는 느낌은 사전적 의미를 넘어선다. 나무도 자라지 못할 정도의 황폐한 땅, 그래서 싱그러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불모의 땅 - 이것이 '황무지'라는 말이 함축한 느낌이다. 작자는 바로 그 뜻을 이 말에 담아 제목으로 삼았다. 제 1 차 세계 대전 후의 유럽이 정신적으로 황폐했다는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다. 이 시는 그 황폐함과 거기로부터의 구원을 추구한 것이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사월'의 이미지가 주는 느낌을 먼저 생각한다. 사월은 봄이고, 봄은 만물이 소생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계절로써 흔히 생명, 탄생, 축복, 시작 등을 상징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잔인한 달'이라고 함으로써 기상 천외한 새로운 생각을 만나게 된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가 그 다음 구절 '모든 것을 뒤덮는 겨울이 오히려 따뜻했다'는 데서 드러난다. 차라리 추억도 욕망도 없이 잠들어 있으면 편안하다는 생각 - 현대인의 모습이라는 것이 시인의 진단이다. 제목부터가 '황무지'라 하여 현대를 상징한 까닭이 여기서 일부 설명된다. 영문학에 정통한 주석으로는 이 구절이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에 나오는 '희망적인 4월'을 부정하는 표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 아주 죽지는 않고 가사 상태에 있었다는 뜻이다. 새로운 가치 추구도, 인간적인 몸부림도, 정신적인 지주도 없이 그저 단조로운 생활을 반복하는 현대이의 삶이 그러하겠구나 하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슈타른버거 호 너머로 소나기와 함께 갑자기 여름이 왔지요. : 독일의 호수, 그리고 여름으로 장면이 급격히 바뀌고 있다. 이 시 셋째 행에서 말한 '추억'을 찾아가는 것으로 보면 된다. 사월이 그것을 일깨운 셈이다. 영문학자들의 주석은 이것도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와 관련되는 것으로 본다. 거기서는 사월에 성지 순례를 떠나지만, 이 시에서는 '추억 순례'를 떠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랑에 머물렀다가 ~ 겨울엔 남쪽에 갑니다. : 생각 또는 화제가 겅중겅중 뛰고 있음에 주목한다. 소나기, 공원, 커피, 출생, 썰매, 산, 밤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그 하나하나가 특별한 상징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휴양지에서 상류 사회 사람들이 그저 주고받는 의미 없는 대화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이 자갈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 나오는가? : 휴양지의 이야기가 여름에서 겨울로 바뀌더니 돌연 불모지의 이미지로 바뀌고 있다. 그 앞에 나오는 '겨울'이 이러 연상을 가능하게 했다고도 하겠으나, 이처럼 생각이 급변하는 과정에 인과의 설명이 전혀 없다. 이를 가리켜 이미지를 나란히 놓음으로써 시상을 전개하는 병치라고 한다.
인자여, 너는 말하기는커녕 ~ 메마른 돌엔 물소리도 없느니라. : 구약 성서 '에스겔' 6장 6절에서 말한 황무지의 이미지라고 해석하는 구절이다. 이 부분의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다. '내가 너희거하는 모든 성읍으로 사막이 되며, 산당으로 황무하게 하리니, 이는 너희 제단이 깨어지고 황폐하며, 너희 우상들이 깨어져 없어지며, 너희 태양상들이 찍히며, 너희 만든 것이 다 폐하며'.
단지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 : 구약 성서 '이사야' 32장 2절((의로운 왕은) 광풍이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에 근거하여 '붉은 바위'가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면 너에게 아침에 네 뒤를 ~ 한 줌의 먼지 속에서 공포를 보여 주리라. : 먼저 '그림자'가 무엇인가를 추리.상상한다. 아침 저녁으로 뒤를 따르고 혹은 앞을 막아서는 그림자는 이 지상의 생명이라고 해석한다. 지상의 생명은 일시적인 것이고, 덧없이 스러지는 것이므로 그림자이다. 그 대신 다른 무엇을 '공포'라고 하였고, 그것을 한 줌의 먼지 속에서 보여 준다고 하였다. 이것은 죽음의 이미지이다.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지만, 그 대신 영원한 생명으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그림자와는 다르다.
바람은 상쾌하게 - 어디서 날 기다려 주나? :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5-8절. 배꾼의 아리아. 사랑의 행복에 넘치는 오페라 아리아가 인용된다. 영원한 생명에서 급격하게 사랑의 찬가로 이미지가 바뀐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 곧 사랑의 기쁨이라고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허지만 히아신스 정원에서 - <황량하고 쓸쓸합니다, 바다는.> : 사랑의 기쁨에서 하아신스로, 히아신스에서 불행했던 기억으로 이어진다. 그리고는 '황량하고 쓸쓸한 바다'의 이미지가 연결된다. '<황량하고 쓸쓸합니다, 바다는.>'이라는 구절은 앞에서 본 바 있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트리스탄이 죽어갈 때 이졸데가 탄 배가 오는가 살펴보던 목동이 트리스탄에게 하는 절망적인 말이다. 이 시의 이미지의 연결은 영원한 생명 - 히아신스의 풍요- 추억의 처절함- 황폐한 바다(황무지)로 신속하게 변화한다. 사랑의 기쁨에서 황무지의 현실로 넘어오는 것은 놀라움을 자아내는 방식이다.
관련 사이트 : http://www.spoem.com/english_poem/ts_eliot.html